리처드 도킨스, 《불멸의 유전자》
나오면 어떻게든 읽게 되는 책들의 저자가 있다. 어느 책에서 약간의 실망을 하게 되었더라도 다음 책이 나오면 찾게 되는 저자다. 나의 경우에는 과학 교양서적의 저자들이 많이 해당한다. 리처드 도킨스도 당연히 거기에 해당한다. 중간에 몇몇 책은 패스한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내 책장에는 리처드 도킨스의 책, 리처드 도킨스와 그의 책에 대한 책들이 한 블록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 리처드 도킨스의 《불멸의 유전자》다. 안 읽을 수가 없다.
제목을 보고는 약간은 갸우뚱, 또 약간은 웃음을 머금었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를 쓰면서 원래 제목으로 하려고 했다고 털어놓은 제목이 바로 ‘불멸의 유전자(The Immortal Gene)’이기 때문이다. 그 제목을 이제 와서 쓴다고? 거의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책에?
그런데 리처드 도킨스가 이 책에 붙인 제목은 “The Genetic Book of the Dead”다. 본문에도 자주 쓰고 있는 말이다. “사자(死者)의 유전자서(書)”. 그러니까 “불멸의 유전자”라는 제목은 우리말 번역본에 따로 붙인 제목이다.
그렇다고 제목이 영 엉뚱한 것은 아니다. 원래 《이기적 유전자》가 그랬듯이, 리처드 도킨스는 투철한 유전자 중심의 진화관, 생명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표현하는 말로 ‘불멸의 유전자’만한 것이 없으니 말이다. 실제로 이 책은 그의 저술 인생의 수미쌍관을 이루는 것처럼 다시 《이기적 유전자》로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이기적 유전자》와 《확장된 표현형》에서 펼쳤던 유전자와 진화의 개념을 다시 정교하게 마루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불멸의 유전자’야말로 그의 진화 개념을 설명하는 더할 나위 없는 용어다.
책에서 자주 언급하는 용어가 있다. ‘팰림프세스트(palimpset)’라고 하는 것으로, 양피지로 만든 고문서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 서양에서는 양피지에다 기록했는데, 양피지는 귀한 것이었기에 기록된 내용을 지우고 새로운 내용을 적곤 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는 ‘이전의 (지워진) 글에 나중에 다른 글을 겹쳐 쓴 원고’라고 정의하고 있다고 한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 팰림프세스트를 자주 언급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 진화의 개념을 잘 비유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생명체에는 몸에도 유전자에도 과거의 흔적 위에 현재의 형태와 특징이 덧붙여져 있다. 그러니까 생명체에서 사실상 과거의 환경을 읽을 수 있다. 물론 훈련된 과학자라야 가능한 경우도 있고, 지금은 가능하지 않지만 미래의 과학자가 이를 해낼 수 있다고도 본다. 진화는 바로 그러한 과거의 흔적을 보존하고 적응해온 과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유전자가 이뤄낸다.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의 유전자 관점(gene’s eye view)에 대한 반대 주장에 대해 아주 강력하게 반박하고 있는데(8장에서 그러한데, 이 8장의 제목이 바로 ‘불멸의 유전자’다), 특히 거의 리처드 도킨스와 막상박하의 팬을 보유했던 스티븐 제이 굴드를 거의 ‘척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리처드 도킨스의 철두철미한 유전자 중심의 진화관에 대해 언짢아 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선명할수록 눈에 띄지만 공격을 받을 가능성도 많아지는 법이다.
어떤 부분에 대해서,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지적하는 것은 아마도 이 분야에 더 해박하고, 더 깊이 연구하는 이들이 할 일이고, 평범한 독자로서 리처드 도킨스의 이 책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미덕은 정말 풍부한 생명체들에 대한 묘사와 설명이다. 환경에의 적응, 수렴, 의태, 위장, 탁란 등등의 예들이 현란하게 이어진다. 어쩌면 이런 현란함에 넋이 나가 그의 이론에 어찌 할 바 없이 동의하게 만들려는 전략처럼 느껴질 정도다.
리처드 도킨스는 포유류, 파충류, 어류, 조류 등은 물론이고 식물, 기생생물, 세균까지 과거의 표현형이나 습성을 중심으로 펼쳤던 ‘이기적 유전자’론은 이제는 최근은 유전체 연구로도 뒷받침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갖가지의 생물학적 증거를 자신의 이론에 통합시키는 데 장인(匠人)급의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진화론은 이미 많이 알려졌다면, 이 책은 바로 그 진화론을 뒷받침하고 있는 생명체들의 향연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