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소설가 이기호. 그의 작품 중 어떤 걸 읽었는지를 찾아봤다.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차남들의 세계사》,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누가 봐도 연애소설》, 《눈감지 마라》, 그리고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까지. 지금까지 모두 일곱 작품을 읽은 셈이다. 그의 작품 목록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기에 그의 작품 중 얼마나 많이 읽었고, 또 얼마나 놓쳤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나는 이기호 소설가의 세계를 애틋하게 여기고 있었던 게 확실하다.
읽은 이기호의 모든 소설의 줄거리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인상만큼은 분명하다. 조금은, 아니 상당히 비루한 삶에 대한 이야기. 아마 그럴 것이다. 주인공 중 상류층의 인물은 물론이고, 번듯한 직장을 가진 이가 있었던가 싶다. 그렇다. 이기호는 사회의 아래쪽에서 버둥대며 살아가는 이들을 그린다. 그들은 떵떵거리며 살아가지 못한다. 간혹 떵떵거리는 태도는 자신의 비루한 삶을 감추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스스로도 그렇게 당당하지 못한 삶이란 걸 안다. 그런데 그런 삶이 애틋하다. 왜냐하면 실은 우리 삶의 모습이 대체로 그렇기 때문이다. 삶의 대부분의 시기 동안, 그게 아니더라도 삶의 어느 한 시기라도 그런 비루하고, 부끄럽고, 내놓고 싶지 않게 살아간다. 버리고 싶지만 버려지지 않는...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의 중심에는 ‘이시봉’이란 존재가 있다. 이 이시봉이란 존재는 엄밀하게 말하면 둘이다. 하나는 강아지, 또 하나는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사람. 물론 이 제목의 이시봉은 강아지다. 비숑 프레제라고 하는 품종의. 개에 대해 잘 모르는 나는 이 비숑 프레제라는 품종이 어떻게 생겼는지 검색해봤다. 충분히 알겠더라. 잘 꾸미면 고귀해 보이고, 아무렇게나 놔두면 꼬질꼬질하기 그지없을, 그런 강아지.
소설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소설은 강아지에 대해 말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장르일지 모른다.
하지만 강아지를 둘러싼 인간의 책임을 묻기엔, 여전히 유효한 장르이다.”
개를 주인공으로 삼아 쓴 김훈의 소설도 떠오르지만, 아무튼 이기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 소설은 그렇다. ‘인간의 책임’을 묻고 있다. 강아지라고 하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생명체가 신분을 얻는 과정도, 그 생명체가 자본주의적 질서에 깊숙하게 편입되는 과정도, 고귀한 신분에 들지 못하는 개들이 받는 비‘강아지’적인 취급도. 그리고 그냥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강아지란 존재도, 모두 결국은 인간의 일이다. 그럴 수밖에. 강아지를 우리 인간 사회 속페 편입시킨 것도, 그것들을 다루는 태도를 결정하는 것도, 그리고 그것을 비판적으로든, 혹은 다른 방식으로든 기록하는 것도 인간이니.
정말 빠져들어 읽었다. 생각해보면 이기호의 소설을, 다 그렇게 읽었지만 이 소설은 더욱 빠져들어 읽었다. 다음 이시봉과 시습이 겪는 이야기ㅁ가 궁금해지고. 이시봉의 조상이 겪은, 역사 같지만 역사가 아닌 이야기를 소설가가 어떻게 지어냈는지도 궁금하고, 정채민의 정체도 궁금해지고, 그리고 결국은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궁금해 도무지 책장을 덮지 못하고, 거의 날밤을 새버렸다.
이 소설에서 굳이 ‘인간의 책임’을 생각하며 교훈을 찾아내 삶에 대한 태도를 바꿔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에서 굳이 교훈을 찾지 않아도 된다. 이런 소설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