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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Dec 05. 2020

무라키미 하루키의 사실과 환상 뒤섞기

무라카미 하루키, 《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많은데, 그중에 ‘몽환적’이라는 것도 있다. 그는 아스라함을 좋아하고, 그 아스라함을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설정을 통해 극대화하는 경우가 많다. 어찌 보면 황당무계한 설정일 수도 있지만,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시대에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 이후에는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걸 비판하기라도 하면 무라카미 하루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될 터이다. 


그건 그렇고, 여덟 편의 단편을 모아 놓은 《일인칭 단수》는 묘한 소설집이다. 마지막 소설의 제목이자 소설집의 제목이 된 ‘일인칭 단수’처럼 모두 일인칭 소설들인데, 소설의 화자가 ‘거의’ 무라카미 하루키‘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화자는 소설가이며, 고향도 그렇고, 좋아하는 야구팀(그는 낮에 야구 시합을 보다 문득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도 그렇고, 재즈를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모두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심지어 한 편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직접 드러내기도 했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면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통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분명 ’소설집‘이라는 장르를 달고 나왔지만, 어쩌면 이건 에세이집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최근에 읽은 《여자 없는 남자들》(단편소설집)과 《이윽고 슬픈 외국어》(에세이집)의 사이 어디쯤 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도 소설은 소설이다. 분명 소설가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굳이 숨기고 있지 않고 있지만, 그런 소설가가 회상하는 이야기들은 ‘몽환적’이다. 거의 있을 것 같지 않은 이야기들이다(료칸에서 원숭이와 대화하는 소설가라니,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라니). 그걸 무라카미 하루키는 마치 자신이 겪은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꾸며내고 있으며, 그걸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거나, 혹은 정반대로 자신을 감추고 있다(“거울에 비친 사람”). 


소설 속 경험들이 모두 몽환적이며, 현실적이지 않은 것도 공통점이지만, 화자가 경험이 모두 일회적이라는 것도 공통점이다. 별 이유 없이 잠을 자거나, 이야기를 나누었거나, 잠시 사귀었거나, 슈만의 피아노곡에 대해 공감을 가졌었거나, 아니면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스쳐갔다는 여인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데 또 하나의 공통점은 그런 잠시의 스쳐가는 만남이 지금까지 ‘나’를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디에선가는 그게 ‘그냥 그랬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그 만남은 내 마음 속에서 길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토로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그 이야기를 이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취는 사라진 것 같지만, 그 자국은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덟 편의 짧은 소설에 사실과 환상, 거짓말을 섞어 놓고 있다. 우리는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굳이 알아낼 필요가 없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는 거짓이라는 것을 구분한다고, 하루키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것도 아니고, 소설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걸 잘 안다. 그는 능수능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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