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파노 만쿠소, 《식물, 세계를 모험하다》
흔히 동물과 식물의 차이를 얘기하라면, 동물은 움직이고 식물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즉, 동물의 능동성, 식물의 수동성이 두 분류군을 구분짓는 가장 큰 특징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스테파노 만쿠소는 단연코 그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가 이끄는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국제식물신경생물학연구소라는 명칭 자체가 그렇다. 식물인데 ‘신경생물학’을 연구한다는 것이고, 그가 쓴 이전의 책 《매혹하는 식물의 뇌》(번역되어 나왔다)도 제목부터(물론 내용까지) 식물의 능동성을 강조한다.
“... 실제로 식물은 동물보다 더 민감하게 주변 환경을 인식한다. ... 식물은 자기 의견을 확신히 전달하는 존재다. ... 사실은 철저한 사회적 유기체다. ... 우리는 잘못 알고 있다. 식물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들은 먼 곳까지 이동한다. 단지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다.” (<프롤로그>에서)
그는 그런 식물의 능동성에 대해 여섯 주제로 나누고, 그 주제에 맞추어 2~3가지 예를 제시하고 있다. 그 식물의 예들을 통해서 식물이 이 지구에서 수행하는 절대적인 역할과 함께 단순히 자극에 대해 반응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보여주고 있다.
식물은 완전히 새로이 생긴 땅을 처음으로 뿌리를 내리고 개척하는 생물이며, 새로운 영역을 침투하여 생태계를 변화시키는 생물이며, 바다를 누비며 신비한 열매를 맺는 생물이며, 수천 년 전의 모습을 간직하며 살아가기도 하고, 씨앗 속에 그 생명력을 보존하기도 하는 생물이다. 그리고 외딴 곳에 홀로 살아갈 수도 있는 식물도 있으며, 멸종의 위험에 노출되기도, 그 멸종의 위험에서 탈출하기도 하는 생물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식물들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잘 적응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환경을 바꾸기도 하고, 진화 압력에 저항하기도, 또 잘 편승하기도 하면서 이 지구의 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자연에서 가장 큰 야생열매를 가진 칼리피제야자에 관한 사연이다. 그렇게 큰 야자열매를 가졌을 때 전파되는 데 제약을 갖는데도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상징적이다. 그리고 또 하나 외로운 나무들의 생존에 관한 부분 역시 매우 인상적이다. 남극에 가까운 무인도 캠벨섬에 홀로 남아 섬을 지키는 가문비나무나 극한 기후인 바레인의 섬의 사막 한가운데 모래언덕 위에 완전히 고립된 채 10미터 이상의 키를 자랑하며 고고히 서 있는 바레인의 생명나무를 직접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상상하게 된다. 아마도 한없이 처연함 속에 몸을 떨며 생명의 끈질김, 생명의 고귀함 같은 것을 절감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수백년, 혹은 수천년은 사하라 남쪽 테네레 사막의 한 가운데에 이정표처럼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나무로 서 있던 아카시가 인간에 의해 두 번이나 공격을 당하며(길도 없는 사막 한 가운데서 자동차 사고라니!) 세상에서 가장 불운한 나무가 되어버린 사연은 인간이 이 세상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어처구니없기도 하다.
이 책은 식물에 관한 이론적인 책이 아니다. 오랫동안 식물을 연구해온 연구자가 식물의 다양성, 혁신성을 이해할 수 있는 예들을 들떠(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을 소개할 때의 그 ‘들뜸’이다)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식물의 모험담이라고 했는데, 식물은 그걸 즐기고, 그걸 통해 생존한다. 식물에 대한 인상이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