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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Jan 30. 2021

일본 작가가 중국인의 시각으로 그려낸 난징대학살

홋타 요시에, 《시간 時間》

어떤 이유로 이 소설을 내 독서 목록에 넣었는지 잊은 채로 책 무더기 속에서 골라 읽기 시작했다. 몇 장을 읽고 전율했다. 아! 이런 소설이구나!


난징대학살을 다룬 소설. 그 처참한 상황을 다룬 소설이라는 점만으로 그 전율을 설명할 수 없다. 작가가 일본인이라는 것도 부분적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주인공이 중국인이라는 점이다. 가해자인 일본 작가가 중국인의 관점에서 이 학살을 바라보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게 가능한 것일까 싶었다. 이에 대해서는 책 말미에 헨미 요의 해설이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소설이 발표된 1955년 즈음에는 일제는 중국을 침략하지 않았다‘, ’난징대학살은 환상이고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았다‘라는 식의 주장을 드러내놓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이 작품이 별다른 논쟁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그게 1990년대 들어 그런 인식을 ’자학사관‘이라고 하면서 난징대학살, 일본군 위안부(사실은 성노예) 등을 국제적 음모라 내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나오기 힘든 소설이 그 당시에는 나올 수 있었다는 얘기다. 헨미 요는 ’기억의 위기‘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홋타 요시에의 《시간》은 바로 그 ’기억의 위기‘에 대항하는 소중한 자산일 수 밖에 없다.


수십 만이 살해당했다는 난징 대학살. 살해라는 표현만으로는 그 참혹함을 드러낼 수가 없다고 한다. 소설은 그 한 가운데서 임신 중이던 아내와 다섯 살 난 아들을 비참하게 잃고(아내는 강간당한 후 살해당하고, 아들은 살아남았었지만 혼란의 와중에 밟혀 죽는다), 사촌 여동생을 잃어버린 후(사촌 여동생은 나중에 돌아오지만 강간당하고, 매독에 헤로인 중독에 빠진 지경이었다) 집단 살육의 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주인공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탈출하고도 일본군이 관사로 사용하는 자신 집의 집사로 들어가 첩보원 활동을 하는 주인공은 전쟁과 삶과 인간에 대해 깊이깊이 성찰한다. 그런데 그 성찰이라는 것이 언제나 인간의 가장 밑바닥까지 보고, 겪은 이후의 것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가까스로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나도 ‘수십 만이 살육당했다’고 했는데, 사실 이렇게 죽음을 숫자로 표현하는 것은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행동경제학이라든가 심리학, 혹은 마이클 센델의 정의론 등에서도 이야기한다). 이에 대해 홋타 요시에는 이렇게 쓴다.

“숫자는 관념을 지워버리는 건지도 모른다. ... 죽은 사람은, 그리고 앞으로 계속해서 죽을 사람은, 수만 명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죽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이 수만에 이른 것이다.”


소설이 가치가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숫자로 기록되는 커다란 덩어리의 비극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이 가지는 비극이 보다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더 공감하게 하고, 더 분노하게 한다. “많은 사람 사이에 끼어서 앞사람을 밀고 뒷사람에게 밀리는 것만으로 충분히 냉혹해지고 비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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