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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Feb 11. 2021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히틀러의 음식을 삼켜야 했다

로셀라 포스토리노,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12년 동안이나 독재 체제하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독재에 순응하는가?

대안이 없었다는 것이 우리의 변명이다. 나는 고작해야 내가 씹어 삼키는 음식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을 뿐이다. 음식을 먹는 무해한 행위 말이다. 그것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겠는가. 다른 여자들은 한 달에 200마르크를 받고 몸을 파는 것을 수치스러워할까? 높은 급여를 받으며 호식을 하는 이 직업을 부끄럽게 생각할까? 그들도 나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에 자기 생명을 희생하는 것을 비윤리적 행위라고 생각할까?“ (196쪽)


우리나라 궁중에는 ‘기미(氣味)상궁’이라는 게 있었다. 왕이 수라를 들기 전에 옆에 있던 상궁이 먼저 맛을 보았다. 나중에는 의례적인 것이 되었다고는 하나 음식에 독이 있는 지를 확인하기 위한 절차였다. 로셀라 포스토리노의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를 읽으며 맨 처음 생각난 게 바로 그 기미상궁이었다. (사실 그런 역할을 맡은 이들이 세계 어디에나 있었을 거란 게 내 생각이다.)


이탈리아의 소설가 로셀라 포스토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이른바 ‘늑대소굴’이라 불리던 총사령부가 있던 볼프스샨체에서 히틀러가 먹을 음식을 먼저 먹는 ‘시식가’였던 마고 뵐크의 인터뷰를 계기로 이 소설을 썼다. 함께 시식가로 활동했던 동료들은 전쟁 후 다 죽고 홀로 살아남은 마고 뵐크는 70년을 가슴 속에 이야기를 묻어두고 있었다고 한다. 처절한 이야기였던 셈이다. 기마상궁과는 다른.


소설은 단순히 한 여인이 전형적인 아리아인 여성으로 지목되어 총통의 안위를 결정적으로 수호할 시식가로 겪은 이야기를 일상적이지 않은, 기이한 이야기처럼 다루지 않는다. 소설가가 일상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다루어야 하는 것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지만, 그 일상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들의 감동과 생각을 끌어낼 수 있으려면 이야기를 통해 보편성을 획득해야만 한다. 이 소설이 인정받는다면 바로 그 보편성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권력자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강제로’ 그가 먹을 음식을 먼저 먹어야 하는 상황은 철저히 인간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이었다. 누구도 저항할 수 없고, 도움의 손길도 내줄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철저히 무시당했던 것이다. 인간은, 생명은 왜 존중받아야 하는지를 이렇게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이야기를 통해 생각하게 한다.


또한 소설은 평범한 이들이 어떻게 악(惡)에 동조하는지, 혹은 저항하는지를 보여준다. 주인공은 나치가 아니었다. 히틀러의 추종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시식가가 되어 그의 생존에 결정적인 도우미가 된다. 그건 강제적인 것이고, 비인격적인 것이었지만, 또한 다른 이들이 굶는 와중에 적지 않은 보수를 받고 충분히 먹을 것을 공급받는 수혜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히틀러가 먹을 음식을 통해 생존하는 동안 주인공은 여러 죄를 짓는다. 주방의 우유를 훔치고, 친구를 배신하고, 전쟁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배신한다. 그것들을 모두 의도적으로 저지른 것이 아니라고 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히지만, 또한 스스로 용서하기도 한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그녀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한나 아렌트가 얘기했던 ‘악의 평범성’은 아이히만에게서 찾을 게 아니라(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 속았다!) 이런 이들에게서 찾아야 한다.


소설은 사랑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로자 자우어에게는 사랑하는 남편이 있었다. 1년 만에 국가를 위해 전쟁에 자원했고, 전쟁 중에 실종 소식을 받는다. 그리고 시식가들을 감시하는 친위대 중위와 사랑에 빠진다. 스스로는 그걸 사랑이라고 하지 못하는, 그저 육체의 요구라고 했지만 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싶다. 그로써 그녀는 죄의식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자신만이 간직한 비밀. 그녀는 사랑의 의무와 권리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실제로 마크 뵐커와 함께 시식가로 활동했던 동료들은 전쟁 후 모두 처형당했고, 자신은 소련군에 붙잡혀 14일 동안이나 성폭행당했다(소설과는 다른 이야기다). 70년 동안이나 가슴 속에 맺힌 이야기를 공개하지 못한 이유는 자신이 나치 추종자로 몰릴 것을 겁내서 그랬다고 한다. 잊고 싶었으리라.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에 대해서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그 부당한 상황에 대해 몸서리쳤을 것이다.


삶. 살아가는 일. 살아남는 일. 그게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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