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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May 26. 2021

문명의 재료

스티븐 L. 사스, 《문명과 물질》

문명이라는 것을 얘기할 때 정신적 구조와 물질적 구조를 모두 포괄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상부구조, 하부구조라는 말로 달리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분명히 나눌 수 없는 경우도 많다. 물질적 배경이 없이 정신적 발달이 가능한지부터 의문이다. 어떤 사상의 배경에는 분명 그 시대가 달성한 물질적 수준이 있었고, 그것에 대한 반영, 혹은 반성이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과거 문명의 수준을 밝혀내는 데는 그 시대의 물질적 성취를 바탕으로 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물질적 구조, 내지는 물질적 성취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물질(substances)’가 존재해야 한다. 어떤 물질, 재료를 이용하여 그 문명을 일구었냐가 중요하다는 것은 우리가 역사를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와 같이 구분하는 것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우리의 문명은 재료의 발달과 함께 해왔다.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스티븐 L. 사스의 《문명과 물질》은 바로 그 인류의 문명을 만들어낸 물질, 재료에 대해 다루고 있다. 돌과 점토의 시대부터 실리콘의 시대까지 역사를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재료들이 어떤 성질을 갖는 이유와 기술적 혁신을 통해 그러한 재료를 개발해가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과학적 설명에는 다분히 전문적인 용어와 내용이 적지 않아서 해당 분야에 익숙하지 않으며 다소 따분하고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냥 쉽게 쉽게,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다양한 독자의 수준에 맞추어 그 과정과 이유를 보여주는 것도 의미 있다고 여겨진다. 실제로는 전공의 수준에서는 훨씬 더 어렵게 설명해야 하는 것을,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 이들에게는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애를 쓴 흔적이 다분하다. 그래서 오히려 고맙기도 하다.


인류 문명의 바탕이 되어온 재료들의 변천은 단선적인 것은 아니었다. 최초의 재료로 여겨지는 게 돌과 점토였고, 그 이후로 구리와 청동의 시대, 철의 시대가 왔고, 강철이 등장하고, 유리가 만들어져 이용되고, 콘크리트가 도시의 모습을 바꾸고, 알루미늄과 백금이 등장하고, 고무와 플라스틱이 현대 문명의 모습을 일신하고, 실리콘이 첨단 현대 문명의 총아로 떠올랐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돌과 점토(세라믹)를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으며, 강철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구리를 이용하여 다양한 제품을 만들고 있다. 그러고 보면, 문명의 발달은 물질이나 정신의 대체가 아니라 다양한 물질을 이용할 수 있고, 더 다양한 사상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스티븐 L. 사스는 다양한 물질(재료)에 대한 기술 혁신을 다루면서 “발명이 시대의 요구와 기술자들의 창의성이 서로 활발하게 맞물리면서 나타난다”고 쓰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스티븐 L. 사스는 이 과정과 결과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철기와 강철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특히 그렇다. 철광석이 발견되었음에도 인류는 오랫동안 철을 이용하지 못했다. 철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탄소를 넣어 주어야 했는데, 그 과정에 필요한 온도를 달성하기가 힘들었으며, 또 다른 필요한 과정을 알아내기도 힘들었다. 그럼에도 옛날의 기술혁신자, 즉 대장장이들은 자신들이 뭘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 문제를 해결했다. 그들은 철을 장시간 가열하는 동안 탄소가 철에 흡수되는 것이 철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도(그들은 철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그 과정을 훌륭해 해냈다. 또한 현대사회를 만드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강철이 개발되는 과정도 드라마틱하다. 실패와 성공이 반복되면서 기술적 발전이 이뤄졌고, 그 용도가 다양해졌다. 그리고 다양한 재료들이 혼합되면서 활용도가 높아졌고, 그것들이 우리의 문명이 지탱하고 있다.


우리의 문명은 현재 전환기에 있다. 숯이 고갈되면서 석탄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지만, 이제 우리는 그 석탄과 석유가 고갈될 위기에 봉착할 것이다.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재료가 필요해질 것이고, 그 새로운 재료를 만들어내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물론 그 일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역사 속의 문명은 그 모습으로 오랫동안 지속된 것 같지만, 실은 그 안에서 무수한 움직임이 있었다.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면 문명은 수명을 다하고 다음 문명으로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현대 문명도 그렇다. 우리가 이용해온 물질들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가 거쳐 온 문명들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우리 현대 문명의 성격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할 길에 대해서도 예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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