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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Jun 20. 2021

인간 문명 종말에 대한 우화(偶話)

베르나르 베르베르, ≪문명≫


우화(偶話). 동물이나 식물을 마치 사람처럼 묘사하여 인간 세계에 교훈을 주는 이야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문명≫은 바로 그 정의에 정확히 부합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많은 소설이 우화의 성격을 갖고 있지만 ≪문명≫은 더욱 그렇다. 심지어 장 드 라퐁텐이라는 우화 작가를 언급한다. 베르베르는 꼭 그를 소개해야만 했다. 이 소설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서.


인간 문명의 종말을 설정하고 있다. 인간 문명은 흔히 예상하듯 핵무기나 기후 변화로 인한 게 아니다. 테러가 촉발하고, 전염병으로 확대된 혼란으로 온다. 그렇게 무너진 문명 이후 쥐들이 발호한다. 결정적인 전염병으로 페스트를 설정한 것은, 쥐를 염두에 두면 당연한 것이지만, 페스트가 지금은 항생제로 치료가 가능한 질병이라는 점에선 다소 상상력을 덜 발휘한 느낌이다. 물론 그냥 ‘질병 X’라고 하는 것보다는 훨씬 성의 있는 설정이다.


고양이나 쥐 무리의 우두머리로 등장하는 개체들이 인간이 실험 동물이었던 것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인간들은 인간들을 위해 각종 동물을 모델로 써왔다. 그것들이 감정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고, 혹은 있는 것처럼 여기기도 했다. 말하자면 때에 따라 유리한 대로 생각했다. 이건 지금까지 벌어진, 벌어지고 있는 일이고, 그 동물들을 사람과, 내지는 인터넷과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조작한다는 설정은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로써 라퐁텐의 우화가 실현되는 것이기도 한데, 이런 설정으로 소설 속 이야기가 성립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조금은 우스꽝스러워지기도 한다(우화란 그런 우스꽝스러움을 의도적으로 설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각 장 사이 사이에 ‘인간’의 역사, 혹은 ‘인간’의 연구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라는 이름으로. 그런데 궁금해지는 게, 소설의이야기가 이 내용을 ‘우화’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백과사전≫이 소설의 이야기를 보완하기 위한 것인지 하는 점이다. 소설의 모든 내용이 ≪백과사전≫으로 보충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고양이의 이야기든, 쥐의 이야기든, 돼지의 이야기든 모두 인간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많은 격언들이 고양이 바스테트의 생각 등을 통해 등장한다. 대체로는 엄마가 했다는 말을 떠올리는 형식인데, 사실 이 역시 인간이 역사를 통해서 쌓아올린 지혜의 한 방식이다. 역시 이 소설은 고양이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다. 다만 인간을 인간 밖에서 보기 위한 방편으로 고양이와 여러 동물의 생각과 입을 빌렸을 뿐. 이런 방식은 인간이 인간을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방식보다 더 적나라할 수 있다. 우화란 그런 것이다.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희망’호를 타고 탈출해서 도착한 뉴욕 역시 쥐들 세상이다. 말하자면 ‘자이가르닉 효과’를 노린 것이다. 특별한 건 아니다. 우리가 매주, 매일 드라마를 보면서 확인하는 것이니.

(※ 자이가르닉 효과: 마치지 못한 일을 마음속에서 쉽게 지우지 못하는 현상http://blog.yes24.com/document/1062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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