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NA Jul 26. 2021

우리는 이 동물들을 잘못 알고 있었다

루시 쿡, 《오해의 동물원》


우리가 동물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얼마나 정확한 것일까? 지저분한 동물이라고, 탐욕스런 동물이라고, 혹은 매우 귀엽고 깨끗한 동물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정작은 정반대의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는 그때마다 놀라움과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지만, 그렇더라도 애초에 가졌던 그 동물에 대한 인상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박쥐가 그렇다. 지금은 박쥐가 온갖 바이러스의 온상으로 알려지면서 다시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애초부터 악마적 성질을 가진 동물로 취급받아왔다. 실은 그렇지 않으며 흡혈박쥐라는 것도 아주 일부(3개종)에 지나지 않으며, 또 흡혈이라는 것도 이빨을 목에 찔러 넣고 피를 빠는 게 아니라 그냥 핥아먹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더라도 박쥐가 내 머리 위를 날아간다면 움찔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 같다. 동물에 대한 인상은 유구하다.


《오해의 동물원》에서 저자 루시 쿡이 쓰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동물에 대한 온갖 오해에 대한 것들이다. 그녀가 다루고 있는 동물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한 가지는 하마, 판다, 펭귄과 같이 인간들로부터 사랑받는 동물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은 나머지 동물들이다.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동물들의 실체를 고발하고 있고, 가지고 있는 이미지로 사람들로부터 불신과 오해의 수모를 당해왔던 동물들에 대해서는 그 억울함을 풀어주고 있는 것이 이 책이 하고 있는 일이다.


우선 사랑받는 동물들에 대해서 보자면, 디즈니 영화의 스타 중 하나인 하마는 사실 아프리카에서 위험한 정도로 1순위에 꼽히는 동물이며, 귀여움의 대명사인 판다는 성적인 면에서 무관심이 정도를 넘어선 동물로 알려져 있지만 대단한 정력을 지니고 있으며, 역시 뒤뚱거리는 모습으로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펭귄은 그 실체를 알게 된 이가 출판을 하지 못했을 만큼 난잡한 성생활을 즐기는 동물이다.


반대로 게으름의 대명사인 나무늘보는 하등한 동물로 경멸해왔지만, 실은 대단히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사용하는 동물이며, 비버는 자신의 불알을 사냥꾼에게 넘겨주어 도망가는 동물이라는 아주 우스꽝스런 동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그렇지 않으며, 하이에나의 경우엔 썩은 짐승의 고기나 먹는, 노동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자웅동체의 짐승으로 알려져 있으나(이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실은 공동 사냥을 통해서 먹이를 획득하는 경우가 더 많으며(사자가 그 먹이를 주워 먹는 경우도 더 많다고 한다), 자웅동체도 사실이 아니다. 말코손바닥사슴은 술에 취한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CNN을 장식하기도 했지만, 실은 사과산과다증에 걸려 생긴 일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 밖의 오해도 있다. 황새가 철새라는 걸 몰랐을 때 겨울 동안 사람으로 변신한다든가, 달로 갔다가 돌아온다고 한다든가 하는 게 거의 정설처럼 여겨지기도 했었다. 하마의 피부에서 나오는 붉은 액체를 피로 오인하여 생긴 하마에 대한 오해도 있었다. 개구리나 지렁이와 관련해서는 자연발생설과 관련한 잘못되었지만, 지독히도 없어지지 않는 오해도 있다.


이러한 오해들의 원천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4세기에 편찬된 《퓌시올로구스》라는 책을 시점으로 최근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근대에 뷔퐁과 같은 대단히 존경받던 자연과학자가 가졌던 잘못된 생각이 그대로 이어진 경우도 있다. 그밖에도 제대로 관찰하지도 않고 들은 것을 나름대로 발전시켜 오해를 증폭시킨 많은 저자들이 있었다. 오해라는 것이 어느 한 사람의 일방적인 주입에 의해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동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합심해서 그런 괴상한 오해들을 만들어 온 것이다.


루시 쿡은 오랫동안 진실처럼 여겨져 왔던 동물들에 대한 오해를 추적하는 것과 동시에 진실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런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노력은 동물들과 함께 생활하고, 또 연구하고 있는 연구자들과 함께 하고 있다. 그들의 작업은 대체로 쉽지 않은 과정이고, 또 대단히 스폿라이트를 받는 작업도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이에나 암컷이 음경으로 새끼를 낳는다고 알고 있을 것이며, 비버가 댐을 짓는 이유를 모르고 있을 것이며, 박쥐들이 피를 빨아먹기 위해 인간을 찾아다닌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엄청나게 중요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런데 그걸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을 비교해보자. 세상이 똑같을까?


루시 쿡은 “동물을 인간과 동일시하려는 자석 같은 충동이야말로 실패와 실수의 가장 큰 요인이자 진실을 호도한 원천”이라고 쓰고 있다. 즉, 동물을 동물로 보지 않고 인간이라는 창에 비추어 해석함으로써 온갖 오해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인간인 관계로 인간을 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것은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그 본능을 극복할 수 있다. 우리가 인간의 관점으로 동물을 도덕적으로 판단한다면 그건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능력을 저버리는 것일 수 있다. 무엇을 알아가는 것, 그것을 체화하는 것의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스튜어디스, 탐정이 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