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NA Sep 29. 2021

주제 사라마구 소설의 원형

주제 사라마구, 《스카이라이트》


1952년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이 배경이다. 여섯 가구가 모여 사는 3층짜리 낡은 아파트.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이 아파트를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다. 마치 그 아파트가 세상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처럼.


구두장이 실베스트르와 마리아나 부부는 조금이라도 가계에 보태고자 세입자를 들인다.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에밀리우는 스페인 출신의 카르멘과 사랑스런 여섯 살짜리 아들을 두었지만 갈등이 깊어간다. 신문사에서 식자공으로 일하는 카에타노와 주스티나 부부는 2년 전 딸을 잃었고, 아내는 당뇨병에 걸려 뼈만 앙상한 채 겨우 살아간다. 그 옆집의 아름다운 리디아는 사업가인 파울리누의 내연녀로 풍족하게 살아가지만, 엄마는 매달 수금하듯 그녀의 돈을 받아간다. 3층에는 칸디다와 동생 아멜리아, 그리고 칸디다의 딸 아드리아나와 이자우라가 산다. 그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사랑하며 얼핏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셀무와 로잘리아 부부가 있고, 그들 사이에는 열아홉살의 매력적인 딸 마리아 클라우디아가 있다. 그들 역시 쪼들리며 살아가면서 딸의 취직 자리를 리디아에게 부탁할 정도다.


소설은 이 여섯 가족의 모습을 돌아가면서 비춘다. 평범한 듯 보였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불화의 씨를 안고 있거나, 붕괴 직전이다(실베스트르의 가족을 제외하고). 카르멘도, 에밀리우도 서로에게 벗어나려 애쓰고, 카에타노와 주스티나는 서로를 빈정거리며 살아간다. 아멜리아는 조카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열쇠를 복제하고 일기를 몰래 들춰본다. 내연녀로 살아가는 딸의 돈을 뜯어가는 엄마는 어떤가? 그런 엄마를 벌레 취급하는 딸은 어떤가? 가족이 따뜻함을 표상한다는 것은 그저 먼 얘기일 뿐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가족의 비루한 모습을 한 꺼풀 한 꺼풀씩 벗겨내면서 사회를 냉철히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런 비루한 삶을 냉철하게 보여주면서도 주제 사라마구는 희망을 끈을 놓지 않는다. 실베스트르와 아벨의 대화는 이상 사회를 꿈꾸다 좌절하는 이야기이지만, 세대를 뛰어넘어 삶과 사랑에 대해 깊이 이야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베스트르가 젊은 시절 사회주의 운동을 했었다는 설정은 주제 사라마구의 정치적 배경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실상은 그런 정치적 성향은 이 소설에서 매우 희미해 보인다. 이 소설은 이 소설의 쓰여진 시기를 감안했을 때 여성의 주체적인 발언이 매우 두드러진다. 비록 사회적 흐름의 주체로 그려지진 않지만, 폭력적인 남편(아마도 사회를 표상하리라)에 힘없이 굴복하지 않는 여성상은 당시에 그리 흔하게 그려지는 것은 아니었으리라.


이 소설은 주제 사라마구가 죽은 후 출판되었다. 그러니까 유고작인 셈이다. 하지만 죽기 직전에 완성한 작품이 아니라 아주 초기의 작품이다. 첫 장편소설 『죄악의 땅(Terra do pecado)』 이후 바로 다음 작품으로 출판사에 투고했지만, 어떤 이유인지 출판을 거절당하고 어느 서랍에서 썩고 있었다. 36년 뒤 우연히 찾게 되었지만, 주제 사라마구는 이 소설의 출판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걸 말하는 방법이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라고 했다. 그는 이 소설에서 했던 얘기를 다른 소설에서 많이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아무리 그가 여기의 얘기를 많이 했더라도 의미가 있다. 그의 소설을 모두 다 읽은 독자만 있는 것은 아니며, 그의 발언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궁금한 이도 있을 것이다. 또한 다른 소설에서의 목소리와 이 소설의 목소리가 동일 할 수도 없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서라도 이 소설 자체가 무척 매력적이다. 그가 죽은 후에라도 이 소설에 이렇게 출판된 것을 반가워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현대 문명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언어, 미적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