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은하수를 볼 수 있었던 밤이 그립다

로저 에커치,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by 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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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하루의 절반에 해당하는 이 시간을 우리는 외면할 수 없다. 우리의 많은 일들이 낮에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그 낮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은 밤이다. 아니 밤에만 이루어지는 일이 있다. 절대 소소하지 않은 일이 밤에 벌어진다.


역사학자 로저 에커치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자연의 시간이자 인간의 시간인 밤, 그것도 산업 혁명 이전, 완전히 깜깜하지도 않으면서 지금과 같이 지나치게 환하지도 않은 그 시대의 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 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는 대충 알 수 있다. 밤은 그 깜깜함으로 인간들에게 공포를 주었을 것이다. 밤에는 낮보다 더 은밀한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약탈과 폭력, 방화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사회에 대한 통제권을 가진 권력이라면 당연히 밤 역시도 통제하려 했을 것이다. 통행 금지나 야경대원 같은 것들이 그런 것이다. 가정은 자신의 재산과 신체를 지키기 위해서 밤이면 문을 걸어 잠그고 요새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밤이라고 잠만 자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교 행위가 벌어지고, 남녀 관계가 진하게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밤의 고독을 즐기거나, 혹은 그것 때문에 괴로웠을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귀족의 밤과 평민의 밤은 달랐을 것이다. 그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사람과 그 시간에도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구분되었을 것이다.


그런 얘기들이다. 로저 에커치는 그런 밤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심각하게 분석하지 않는다. 다만 그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들에 대한 증거들을 모았다. 온갖 자료들 속에서, 그 숱한 밤들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한 기록을 모으고 소개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 자연히 우리의 밤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밤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시간이었지만, 바로 그 두려움을 주는 성질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의 창의성이나 기지에 큰 자극을” 주었다. 사람들의 본성을 더 극명하게 드러내주었으며, 또 계급에 따라 아주 큰 차이를 보일 수도 있었지만, 또 때에 따라서는 그 차이를 거의 없애주는 시간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너무나도 의미가 달라지는 시간, 존재였던 셈이다.


이제 이미 거의 상식이 된 것이긴 하지만 산업화 이전 시기에 사람들이(아프리카에서도 그랬다고 하지만 동양에서는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두 번 잠을 잔 데 대해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첫 번째 잠과 두 번째 잠 사이에 무슨 일을 했는지에 다채롭게 쓰면서, 그게 사라진 것이 바로 우리가 밤을 외면하기 시작하면서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평민들이 두 번 잠을 자던 시기에도 밤을 밝힐 수 있는 도구를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이들은 늦게 잠들었고, 도중에 깼다 다시 자는 일이 없었듯이 현대인들에게는 그런 두 번의 잠이 보편적이지 않게 되었다.


18세기 이래 인공 조명이 보편화되고, 또 강도도 강해지면서 “밤의 지배”는 끝이 났다. 아마 인류 문명이 어떤 사고로 인해 박살이 나지 않는 이상 우리의 밤은 더 이상 이전처럼 깜깜함에 갇혀 있지는 않을 것이다. 밤에 대한 두려움은 많이 사라졌고, 어둠 자체에 대한 공포나 신비감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로저 에커치가 지적하고 있듯이 “밤하늘에 남아 있는 아름다움, 어둠과 빛이 바뀌는 주기, 낮의 빛과 소리의 세계로부터의 규칙적인 안식처”는 손상되었다. 사생활은 덜 보호받고, 자아 성찰의 기회도 줄어들었다. 과연 밤이 밤처럼 존재해야만 그런 게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봐야겠지만 말이다.


얼마 전에 정말 오랜만에 밤하늘에서 별자리를 보았다. 함께 보던 이들과 함께 은하수 얘기를 했다. 은하수를 직접 봤다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밤하늘의 은하수를 책에서만 배우지 않았으니. 그러나 그곳에서도 은하수는 볼 수 없었다. 아쉬웠다. 아주 깜깜한 밤이 가끔 그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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