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옥스퍼드대학 보들리도서관 관장 리처드 오벤든은 주로 서양의 예를 중심으로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책, 내지는 기록물(현재의 것에는 디지털 정보까지 포함한다)이 처했던 비극적인 운명과 가치에 대해 쓰고 있다. 책을 읽으며 몇 가지를 생각해봤다.
1.
“호고가들의 과거에 대한 집착이 미래를 위해 그것들을 보존했다.” (124쪽)
도서관은 과거의 것을 보존한다. 말하자면 기억을 위한 것이다. 그 물리적인 기억은 위험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벨기에의 루뱅대학교 도서관을 불사른 것이나, 세르비아 민병대가 사라예보의 도서관을 포격의 표적으로 삼은 것을 보면 확실하다. 그래서 그 물리적인 기억을 보존하고자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들이 있었고, 사라진 기억을 되돌리고자 아낌없는 지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미 과거의 것이 되어 버린 것들에 대한 기록이 왜 그토록 중요할까? 그것은 그 기억이 미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아무 것도 없는 바탕에서 오지 않는다.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과거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과거에 대한 기억이다. 그래서 물리적인 기억, 즉 기록물(대표적으로 책)은 중요하다.
2.
공적인 기록물에 대한 얘기는 당연한 것이라 어차피 덧붙여봐야 요약에 불과할 것이나 개인적인 기록물에 대한 얘기는 한번 더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리처드 오벤든은 몇 사람의 예를 통해 개인적인 기록물의 파기와 보존을 비교하고 있다.
헨리 8세의 총신이던 토머스 크롬웰은 죽기 전에 자신이 발송한 편지를 고의로 파기했다. 그것은 자신과 부하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 당시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한 생생한 증언 일부를 잃어버렸다.
시인 바이런은 직접 회고록을 작성했고, 그것을 친구 토머스 무어에게 전달하면서 사후 출판을 허락했다. 하지만 무어는 바이런의 가족들과 (이미 선인세까지 지급한) 출산사와의 협의 끝에 원고를 불길 속에 던져버렸다. 바이런은 방탕한 생활로 유명했고, 그의 명예를 지켜주는 것이 옳다는 판단을 한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사라진 작품의 신비감”을 가져왔고, “시대를 앞서간 작가로서의 명성”이 더해졌다고 보고 있다.
카프카의 친구는 다른 결정을 했다. 살아 생전 몇 작품 밖에 발표하지 못했던 카프카는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그는 죽기 전 친구인 막스 보르트에게 자신의 모든 작품과 기록을 파기해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브로트는 카프카와의 약속을 져버렸다. 그는 카프카가 문학 분야에서 마땅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고, 순차적으로 그의 작품을 공개했다. 그리고 문학사는 풍성해졌다.
필립 라킨과 실비아 플래스의 예도 흥미롭다. 라킨의 경우는 자신의 의지로, 실비아 플래스의 경우는 그의 (이미 별거 상태였던) 남편에 의해 작품과 개인적인 기록들이 선별되어 공개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선별된 기록에 대해 어느 정도나 신뢰를 가질 수 있을까? 리처드 오벤든은 이렇게 쓰고 있다.
“지식의 보존은 결국 미래에 대해 신뢰를 가지는 것이다.” (241쪽)
공적인 기록과 개인적인 기록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는 것은 아니다.
3.
디지털 기록에 관한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웹상에 기록되는 디지털 기록은 영원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한 연구에 의하면 1년 안에 게시물의 11퍼센트가 사이트에서 사라지고, 손실률은 계속 이어진다고 한다(358쪽). 갑자기 내 경험이 생각났다. 내가 처음 블로그를 한 것은 한 신문사의 블로그를 통해서였다. 많이 썼다. 그런데 어느 날 블로그 운영을 중단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기록들이 한꺼번에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이다. 다행히 신청자에 한하여 그동안의 기록을 USB로 저장해서 보내준다고 했고, 좀 시간을 걸렸지만 무사히 전달받았다. 아마 신청하지 않은 이들의 기록은 그대로 허공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나의 기록도 그렇게 온라인 상에 존재했을 때와 USB에 저장되었을 때는 의미가 다르긴 하다.
그래서 리처드 오벤든은 웹 기록의 갈무리가 중요하다고 한다. 그 엄청난 기록을 어떻게 다 기록할 수 있을까 싶다. 그도 인정한다. 모든 기록물을 보존할 수는 없다고. 그래도 디지털 기록물도 공적인 보관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자금이 필요한데, 그것을 이른바 ‘민간 열강’(처음 접한 용어지만, 대충 어떤 데인지는 알만 하다)으로부터 ‘기억세’를 받자고 한다. 과연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디지털 기록의 보존에 대해 처음 생각해보게 되었다(‘잊혀질 권리’와는 상충되는데, 그 얘기는 이 책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