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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義)'와 전쟁에서의 승리

영화 <한산: 용의 출현>

by 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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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궁금했던 것은 박해일의 이순신은 또 어떤 모습일까 하는 것이었다. 많은 배우들이 이순신 역할을 했다. 어쩌면 비슷했고, 또 어쩌면 서로 달랐다. 최근의 이순신으로 김명민이 있었고, 최민식이 있었다. 특히 최민식의 이순신은, 가장 최근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죽다 살아나 다시 죽음의 길로 뛰어드는, 온몸이 병들었지만 기개만은 남아 있는, 완전히 불리한 형세를 뒤집어 버리는 용감한 전법 등등.


박해일의 이순신은 다를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행여 최민식의 이순신에 많이 못 미치면 어쩌나 하는 염려도 했다. 그런데 영화를 본 이후의 감상은 박해일의 이순신은 이순신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기에 적절했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기개가 넘치는 용감한 장수였지만, 놀라울 만한 전법을 펼친 전략가이기도 했다. <한산: 용의 출현> 이 영화는 오직 이순신이 한산 앞바다에서 어떻게 일본군들을 수장시켰는지에만 집중한다. 그 과정을 보여주는 데 이순신의 조선에 대한 충성이라든가, 민중에 대한 사랑이라든가 하는 것들은 과감히 쳐냈다. 오로지 승리. 그 승리를 위해 어떤 전략을 쓸 것인지에 대해서만 고심하고, 또 고심한다. 사실 바로 그 승리야말로 충성이고, 애민이었다.


영화에서 이순신은 이 전쟁을 ‘의(義)와 불의(不義)의 싸움’이라고 했고, 이에 왜군이 항왜(降倭)가 된다. 그 전쟁에서 그런 선택을 한 이들이 없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왜(倭) 쪽에 선 조선인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그런 선택을 한 이들은 무엇을 ‘의(義)’로 여겼을까 궁금하다. 어쩌면 ‘강(强)’을 ‘의(義)’로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임진왜란 300년 후 아주 태연히 쎈 쪽에 붙은 이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순신의 ‘의(義)’는 말 그대로 제대로 된 명분 없이 침략해온 왜의 불의(不義)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을 이겨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전쟁은 언제나, 어느 쪽이나 자신의 쪽에선 겉으로 “의와 불의의 싸움”이다. 그렇지 않다면 전쟁의 동력을 얻어내지 못한다. 그리고 승리한 쪽이 의로운 쪽이 된다(적어도 겉으로는). <한산>이 오로지 이순신의 승리를 위한 과정으로 영화를 그린 것은 그런 면에서 대단히 현실적이고 타당한 방식일 수 있겠단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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