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로서 겨우 일곱 편의 소설을 내놓았다면 뭔가 미진한 면이 있어 보이지만, 에코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소설가가 아닌 (다양한 분야에 통달한) 학자로서 쓴 글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전혀 고려치 않더라도 그의 소설 일곱 편만을 가지고도 그는 최고의 소설가다.
나는 그의 소설을 다 읽었다. 그래서 얼마나 성실하게, 꼼꼼히 읽었는지와는 상관없이 나는 에코 소설의 자격 있는 독자라 생각한다.
3.
강연 내용을 바탕으로 한 이 책은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은 소설가로서 자신이 생각하는 소설과 소설가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소설에 대한 생각이 독립적인 구성으로 담겨 있다. 하지만 각 장은 모여서 소설가, 내지는 소설 애호가로서의 에코를 분명하게 드러낸다(물론 그런 에코를 제대로 이해하는지와는 별도로).
4.
우선 첫 번째 장.
첫 번째 장에서는 자신의 소설 창작과 관련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고 있다.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에서도 밝히긴 했지만, 어떻게 해서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다른 작품들은 어떤 단초에서 시작되었는지, 그 작품을 쓰기 위해 어떤 일들을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말하자면 소설가로서 사적(私的) 고백인 셈인데, 그렇기에 별로 뛰어나지 못한 독자로서 나는 이 장이 가장 재미있다.
에코는 자신의 작품이 치밀한 사전 작업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쓰고 있다. 무엇을 쓸 것인지 확고한 생각이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에 대해 무척이나 고민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독자의 오독(誤讀)은 어쩔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작품은 그 오독을 이겨낼 수 있음을 자신하고 있다(물론 창조적 오독은 환영한다).
두 번째 장은 문학 이론에 대한 이야기다. 앞에서는 오독을 이겨내는 치밀한 구성을 이야기했다면, 여기서는 작품에 대한 해석의 여지에 대한 적극 옹호한다. 그런데 그런 해석의 여지를 가지고 그의 작품을 제대로 오독하자면 지적인 수준이 어느 정도 올라와 있어야 한다. 텍스트는 무한한 기호와 상징의 집결체이므로 그저 멋대로 읽는다고 창조적 읽기가 되지 않는다. 작품 속에 나오는 단어나 문장을 다른 작품과 연결할 수 있는 기본적인 독서가 되어 있을수록, 그리고 그것을 떠올릴 수 있는 기억력, 내지는 성실함이 있어야 한다.
나는 어떤 학문에 대한 책이건 일종의 추리소설, 즉 어떤 종류의 성배(聖杯)를 찾는 탐구 보고서처럼 써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세 번째 장에는 소설가로서의 존재론적 고민이 담겨 있다. 역사적 실체, 즉 나폴레옹이나 히틀러라는 존재, 혹은 그들이 벌인 일들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 없이 참이라 할 수 없으면서도, 안나 카레리나나 세르반테스와 같은 허구적 인물은 오히려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소설 속의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그래서 이런 문구는 찌릿하다.
“현실 세계에서 수백만 인구(아이들을 포함하여)가 기아로 사망하는 상황에는 별로 불행해하지 않으면서, 베르테르나 안나 카레니나의 죽음에 크게 비통해하는 건 도대체 무슨 경우일까?”
네 번째 장은 너무나도 현학적이다. 열거의 예들을 다른 작품들과 자신의 작품들에서 꺼내 오고 있다. 사실 인용한 텍스트를 읽기에는 벅차다. 그리고 작품들에서 그걸 모두 열거한 까닭은 알겠지만, 그것을 다 읽을 것인지 기대하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작가들이 그랬듯이 에코 역시 자신의 지식과 언어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걸 굳이 이렇게 한 장을 할애하고 있는 것은, 그런 걸 읽을 때 한번 쯤 고개를 끄덕여달라는 부탁이 아닐까?
5.
에코는 분명 앞날이 창창했던 ‘젊은’ 소설가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없고, 그의 소설은 일곱 편으로 멈췄다.
그래도 괜찮다. 그의 소설은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니, 일곱 편보다 훨씬 많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