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왜 베네치아를 떠나지 못했나?

토마스 만,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by ENA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은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설 속 주인공은 말러보다는 토마스 만 자신을 연상케 한다. 물론 그가 이 소설을 쓸 때는 30대였고, 소설 속 주인공 아쉔바흐는 노년의 나이지만, 작가로서의 동질성이 더 도드라져 있다.


대가의 반열에 들어섰으며 귀족 칭호를 받아 성 앞에 ‘폰(von)’을 쓸 수 있게 된 작가 아쉔바흐는 차를 기다리다 문득 남쪽으로 휴양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한다. 스스로 지쳤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불현듯한 열망이었는데, 결국 아쉔바흐가 도착한 곳은 베네치아였다. 베네치아에서 그가 마주친 것은 베네치아라는 도시가 아니라 베네치아에 요양 온 한 소년이었다. 타치오라는 이름의 소년은 너무나도 우아하고 아름다웠고, 한 순간에 아쉔바흐의 마음을 빼앗아 버렸다.


이야기는 아쉔바흐가 타치오라는 미소년에게 마음을 빼앗긴 이후 작가 내면의 독백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동성애를 다룬 소설로 비치기도 한다. 콜레라가 만연해가는 베네치아를 떠나려다 타치오 때문에 계속 머물고, 그의 뒤를 쫓는 장면을 보면 그럴만도 하다. 그리고 ‘늙은’ 예술가가 ‘어린’ 소년의 아름다움에 모든 것을 빼앗기는 듯한 모습은 어쩌면 추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을 자세히 읽으면 소설가가 그리고 있는 것은 한 늙은 남자의 어린 소년에 대한 탐닉이 아니라, 예술가의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가 더 눈에 띠는 걸 알 수 있다. 성적인 비유에 집중할 때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깊은 세계를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 소설이 1차 세계대전을 바로 앞둔 노곤한 시절에 쓰여졌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토마스 만이 무엇을 비판하고 있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소년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혹은 그것을 바라면서 작가는 도시를 떠나지 않았고, 결국 지극한 아름다움을 목격하면서 죽어갔다.


“그에게는 마치 그 창백하고 사랑스러운 영혼의 인도자가 저 멀리서 자신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짓하며 부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소년이 허리에서 손을 떼고 먼 바다를 가리키며, 자기가 앞장서서 그 광활한 ‘약속의 바다’ 속으로 둥실둥실 떠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쉔바흐는 지금까지 자주 그랬듯이 소년을 따라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IMG_KakaoTalk_20230303_193258352.jpg




굳이 이 소설을 읽게 된 동기를 이야기하라면, 콜레라 때문이다. 소설에서 베네치아의 음산하고 음흉스런 분위기를 좌우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으로 이어지는 전염병, 콜레라 때문이다. 도시는 콜레라의 발병과 전파를 감추려 하지만, 죽음의 기운은 도시를 휘감고, 아쉔바흐를 비롯한 사람들은 그것을 직감한다. 하지만 아쉔바흐도, 폴란드인 가족도 왜 도시를 떠나지 않았을까? 토마스 만이 전염병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불가피한 재앙으로 설정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전염병이 만연한 도시를 이야기해야 했으며, 그 죽음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이 은밀하게 반도덕적이면서 피할 수 없는 유혹이어야 했던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기억의 7가지 오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