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부부에 관한 4가지 시선, 그리고 신화의 해체

에르난 디아스, 『트러스트』

by ENA

“그 허구의 글에 나오는 상상 속 사건들이 이제는 내 삶의 실체적 진실보다도 현실 세상에 더 강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네.” (273쪽)


뉴욕 금융가의 전설이 된 부부에 대한 한 소설가의 악의적인(?) 소설, 그 소설에 맞서 자신의 인생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남편의 회고록 초안, 그 회고록을 대필한 작가의 회고록, 그리고 아내의 일기장. 소설은 이 이질적인 4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순진한 독자로서 해럴드 베너라는 소설가의 소설 형식을 띤 1부(<채권>)를 읽으면서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분명히 벤저민 래스크(앤드루 베벨)라고 여겼다. 아내 캐서린 브레보트(캐서린 래스크가 되고, 밀드레드 베벨을 가리키는)는 벤저민 래스크의 옆에 서 있다 그녀의 아버지처럼 광증으로 세상을 뜨는 존재로 그려진다.


앤드루 베벨의 회고록인(결국은 미완성이 되어버린, 왜 미완성인 상태인지는 3부에서 확인된다) 2부 <나의 인생>에서는 더더욱 앤드루 베벨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게 확실해진다. 여기서 밀드레드 베벨은 광증이 아니라 암으로 죽게 되는 것으로 나오지만 미국 금융을, 결국은 세계의 금융을 좌지우지한 벤저민 래스크의 옆이 아니라 뒤에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밀드레드는 벤저민의 가호 아래 빛을 내는 달빛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던 것이 앤드루 베벨의 회고록을 대신 쓴 소설가 아이다 파르텐자가 먼 훗날(그러니까 지금 시점이 된다)의 회고록인 3부 <회고록을 기억하며>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글을 쓰던 작가도 아닌 시절, 비서로 앤드루 베벨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회고록을 쓴 아이다 파르텐자의 회고록은 단순히 회고록을 어떻게 대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회고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자신과 아버지와의 관계가 앤드루의 회고록과 거의 대등한 비중을 차지할 정도이며, 결국은 그 관계가 앤드루 베벨과의 관계, 밀드레드와 그녀의 아버지와의 관계 등과 중첩된다. 말하자면 자신의 성장기(記)인 셈인데, 그럼에도 이야기의 중심은 물론 밀드레드의 정체(?)다. 이 회고록은 밀드레드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밝혀져 가는 과정이며, 또한 그런 아내를 감추고, 자신의 후광 아래에서만 빛을 낼 수 있는 미약한 존재로 전락시키고자 하는 앤드루의 계략(“베벨은 밀드레드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보다 그녀를 완전히 특징 없고 안전한 인물로 바꿔놓는 것을 더 원했던 것 같다.” 346쪽)이 드러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대필 작가의 기억까지 표절해가며.


그러한 과정은 이제야 입수한 것으로 설정된 밀드레드의 일기(4부)로 확정이 된다. 암에 걸린 후 스위스의 요양병원에서 쓴 일기는 뉴욕 금융의 전설은 앤드루가 아니라 밀드레드가 만들어낸 것이며, 그녀는 현대 음악의 주요한 후원자였던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앤드루의 도덕적 결함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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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것은, 이 4개의 이야기가 동일한 선상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에르난 디아스는 완전히 다른 형식으로 4개의 이야기를 구성했으며, 그 4개의 이야기가 다른 다른 방향을 향하면서도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비추도록 했다. 거기다가 오로지 앤드루와 밀드레드 베벨의 이야기, 즉 밀드레드 베벨의 정체, 혹은 역할에만 중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 계급, 부부의 관계, 부녀의 관계 등을 세심하게 다루고 있다. 급하게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으며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겹겹이 쌓여진 꺼풀들을 거두면서 짜증나는 것이 아니라 이 과정 하나 하나를 즐길 수 있는 소설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옮긴이는 이 4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이 결국은 뉴욕 금융가를 좌지우지한 앤드루 베벨의 아내 밀드레드 베벨의 삶을 추적해가는 추리소설의 형식을 띠었다고 하고, 그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그녀의 일기장에서 진실이 드러난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일기가 늘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일기를 써본 사람은 다 알 듯이, 그리고 오래 전 일기를 다시 들춰봤을 때의 당혹감을 느꼈던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인정하듯이 일기가 늘 진실인 것만은 아니다. 밀드레드가 죽음을 앞두고 작성한 일기이기 때문에 더 진실일 가능성이 높을 수는 있지만, 어찌 되었든 그것은 한 사람의 개인적 기록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 밀드레드의 일기에 기초해 아이다 파르텐자의 회고록에 신빙성을 더하는 것을 판단하겠지만, 진실이 그것이 아니라면? 실제로는 앤드루 베벨의 이야기가 실제의 이야기였다거나, 혹은 그들 모두의 이야기가 진실과 거짓의 모자이크일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이 마지막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그것까지도 염두에 두었다면 정말 놀라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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