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응자들에 관한 이야기

성석제, 『이 인간이 정말』

by ENA

2008년부터 2011년 사이에 발표된 작품들을 모은 단편소설집. 세태를 담고 풍자하는 소설인데, 이미 그로부터 10년이 훌쩍 지났으니 시효가 지난 소설들이라 해야 할까? 물론 이 소설들이 건너온 세월의 무게를 오롯이 견디어 낼 정도로 단단한 체력을 지닌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서 얘기하는 게 그 10년이라는 세월이 깡그리 부정해버릴 만한 성격의 것이 아니란 점도 확실하다. 소설은 소설을 읽는 시점이 현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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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읽으면서 생각난 건데,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떠들었던 얘기가 생각났다. ‘뉴 노멀(New Normal)'. 뭔가를 알고 있으며, 미래를 얘기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 그저 ’새로운 시대‘, ’새로운 표준‘ 정도인 말을 유식하게 포장한 말이었다. 그게 무언지도 얘기하지 않으면서 그런 표현을 즐기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막바지에 이르면서는 오히려 그 말이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는 코로나-19가 가져온 변화에 대해서 얘기하기보다는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희구하고 있을 뿐이다. 뉴 노멀? 그게 뭔데? 아니 그게 뭐였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만들어내지도 않았어도, 아니 그런 말을 만들어낼 여력이 없었던 1997의 IMF 구제금융이야말로 우리나라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돈을 바라보는 관점이 보다 현실적이 되었고, 그래서 삶의 우선 가치가 바뀌었다. 그 시점을 계기로 바뀐 것이 많지만, 대표적으로 대학입학에서 선호하는 학과가 완전히 바뀌었다. 최상위권은 무조건 의대를 지망하게 되었다. 이유는? 안정적이어서. 즉, 짤리지 않으니까. IMF 구제금융의 흔적이 아닐 수 없다.


그로부터 10년 전의 현실 사회주의국가의 붕괴에 이어 IMF 구제금융 시대를 거치면 우리나라는 자본주의야말로, 그렇게 인용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인정하는 최선의 이념이 되었다. 모두가(이렇게 말하면 좀 그러니까 대부분이라고 완화시켜도 의미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바라는, 자본주의에 적응된 인간이 되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그게 어떤 것인인지도 명확하지 않다는 게 문제이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바로 성석제의 소설들에서 인물들이 바로 그런 인물들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자본주의에 지나치게 적응하여 오히려 부적응자가 되어버린 사람들. <론도>의 주인공 박정국으로 비롯하여 노인도 그렇고, 정비소 사장도 그렇고, 사고를 내고 도망간 사람도 그렇다. <남방>에서 오토바이로 라오스를 여행하는 사업가(?) 박씨도 그렇고, <찬미(贊美)>의 이민주도 그렇다. 표제작 <이 인간의 정말>의 돈 많은 집안의 백수 주인공 역시 ‘돈’이 있기에 집안에 틀어박혀서 그 시시콜콜한 지식, 실은 세상 살아가는 데 그닥 쓸모없는 지식을 모조리 주억거리고 있으며, <홀린 영혼>의 이주선, <해설자>의 김문일도 세상에 가장 제대로 적응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결국은 가장 적응하지 못하고 떠다니는 존재일 뿐이다.


그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부적응자인 이유는,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자본주의라는 이념으로 점철된 세상이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어느 시점 이후에 우리에게 필수적인 것이 되어버린 그런 좀스러우면서도 거대한 자본주의의 것이기 때문이며, 그렇게 악착같이 추구하면서도 그것이 삼고 있는 기준에는 도무지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건 방금 인용한 인물들만의 얘기가 아니라 그들 주변에서 그들을 관찰하고 함께 하는 이들도 별 다를 바가 없다. 바로 그들이 ‘우리’다.


글을 쓰는 사람을 구분해보면 여러 부류가 있지만, ‘글쟁이’라고 부를 만한 이들이야말로 부럽다. 무엇을 써도 술술 쓰는 것 같고, 또 술술 읽히면서도 무릎을 치게 하거나,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슬며시 웃음 짓게 한다. 성석제가 그런 소설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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