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이렇게 늙어갈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올리브 키터리지』

by ENA

2009년 퓰리처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기대감을 갖게 하는 소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로는 세 번째인 이 책이 우리나라에 먼저 번역되었지만, 나는 그녀의 첫 번째 장편인 『에이미와 이사벨』을 먼저 읽었다.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하던 그녀가 드디어 인정받은 소설이었고, 이어 퓰리처상까지 받게 되었다. 어떤 작품에 퓰리처상에 주어지는지 궁금했는데, 책을 번역한 권상미가 친절하게 알려준다. “미국인 작가가 미국적 삶을 다룬” 작품에 주어진다고. 그렇다면 충분히 자격이 있는 소설이다.


그러나 “미국적 삶”을 다뤘다고 해서 소설이 특수한 조건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충분히 미국적인 삶을 다루었지만, 인간 삶의 본성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 삶의 디테일이 다를 뿐. 그래서 이 소설을 미국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기 위해 읽는 소설은 아닌 셈이다.


제목의 ‘올리브 키터리지’는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늘 주인공은 아니다. 소설은 분명 장편소설이지만, 또 장편소설이 아니다. 열세 편의 단편이 있으니 단편소설집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또 그렇지도 않다. 분명 장편소설이고, 주인공은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미국 메인 주 바닷가 마을 크로스비를 거의 떠나본 적 없는 거구의 수학 선생님이다. 어떤 단편에서는 그녀가 분명 주인공이며, 그녀의 시선으로, 그녀의 목소리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또 적지 않은 단편에서는 그녀는 ‘지나가는 사람 1’ 정도의 역할밖에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올리브 키터리지는 모든 단편에 등장한다. 하지만 크로스비라는 마을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녀는 그녀 삶에서 주인공이지만, 다른 사람의 삶에서는 조력자이거나, 구경꾼이거나, 방관자이거나, 혹은 전혀 관계 없는 인물인 셈이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듯이.


올리브 키터리지는 어쩌면 전형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포근함을 느낄 수 있는 다정한 엄마도 아니며, 사랑스럽고, 헌신적인 아내도 아니다. 그렇다고 큰 문제를 일으키는 인물도 아니다. 퉁명스럽지만, 속으로는 상처를 입고, 그 상처를 겉으로 드러내기를 거부하다 한꺼번에 터지기도 하며, 무서운 수학선생님이지만, 또한 가끔은 인생에 도움이 되는 훌륭한 이야기를 전해주기도 하는 여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앞에서 얘기한 전형적인 엄마, 아내의 모습 자체가 사실은 어디서도 보기 힘든 모습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우리가 흔히 만나는 모습은 이런 모습일 수도 있으며, 이렇게 모순적인 모습을 함께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소설이 ‘미국적인 삶’을 잘 그려냈다고 퓰리처상을 받았지만, 그만큼 또한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이 담겨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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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자체에도 출렁임이 있고, 전체적으로도 그렇다. ‘기-승-전-결’이라는 꽉 짜인 느낌은 아니지만, 약국은 운영하는 중년의 헨리와 올리브 키터리지가 새로운 약국 점원 데니즈로 인해 약간의 위기를 겪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동네의 여러 대소사를 겪고, 아들에 대한 사랑과 배반감을 안고 살아가다, 남편 헨리가 뇌졸중으로 쓰려지고, 죽고, 그러고 끝에는 배우자를 잃은 이들끼리, 너무도 다르지만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까지. 다 읽고 나면 ‘싸-한’ 느낌이 든다. 나도, 우리도 이렇게 늙어가겠구나. 나는 어디까지 와 있는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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