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페스트에 관한 비망록

다니엘 디포, 『전염병 연대기』

by ENA

런던 페스트에 병들다

때는 1665년,

저세상에 입적한 그 수 몇 십만이랴.

그러나 나는 살아남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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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서는 1666년을 1905년과 함께 ‘기적의 해’로 부른다. 1905년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과 함께, 광전효과, 브라운운동에 관한 논문을 쏟아낸 해다. 1666년은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해다. 뉴턴은 케임브리지대학을 다니던 중 전염병의 창궐을 피해 고향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중력에 관한 법칙을 알아냈다. 그가 시골 고향으로 내려간 이유. 바로 1665년 영국, 특히 런던을 비롯한 대도시를 강타한 페스트였다.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 다니엘 디포가 『전염병 연대기』에서 그리고 있는 페스트가 바로 1665년의 페스트다.


다니엘 디포의 『전염병 연대기』는 전체적으로 중심인물도 없고, 하나의 극적인 스토리도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는데, 중심인물은 마구상을 운영하는 ‘나’이며, 하나의 스토리는 바로 ‘페스트’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명의 런던 시민이 페스트가 창궐한 도시, 런던에서 보고 들은 것, 느낀 것들을 회고해서 정리한 글이 바로 이 『전염병 연대기』다.


다니엘 디포가 이 ‘소설’을 발표한 시점은 1722년이니까 디포가 1665년 페스트에 관한 직접적인 관찰자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은 소설을 넘어서 당대의 관찰처럼 읽히는데, <사망주보>의 여러 숫자들과 상세한 질병 묘사, 실감나는 사람들의 반응들 때문에 그렇다. 디포는 도시를 장악한 질병, 페스트의 시작에서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어떻게 죽여나갔는지, 그 질병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는지, 당국의 정책은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등등을 마치 비망록, 내지는 보고서처럼 쓰고 있다.


디포가 묘사하고 있는 처참한 장면에는 시체를 처리하는 광경이 있다. 이 장면은 여러 차례 반복되는데,


“그 차에는 16, 17개의 시체가 실려 있었는데, 어떤 것은 리넨 천으로 둘둘 말린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모포에 싸인 것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오로지 팬티 하나만 걸친 시체도 있었다. 시체들이 차에서 내던져질 때, 입고 있던 것들도 모두 벗겨져 구덩이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한 행위가 시체 자신으로서는 아무 상관이 없을지 모른다. 말하자면 인류의 공동묘지 속에서 사이좋게 살을 비비고 파묻히니까. 그 속에선 아무런 차별도 없었다. 가난뱅이든 부자든 다 같이 뒹굴고 있으니 말이다.” (107쪽)


이처럼 부자든 가난뱅이든 구별도 없이 마구 파묻히는 장면도 있지만, 마부나 말이 함께 내던져지지는 장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실수로 함께 파묻히는 장면들이 여러 차례 반복된다. 죽어가는 모습도 비참하지만, 죽음 이후에도 대접받지 못하는 역병(疫病)의 모양은 정말로 비참하기 그지없다.


디포의 『전염병 연대기』에서는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와는 달리 도시가 폐쇄되지 않는데, 대신 런던을 빠져나가라는 인물들의 처절한 고투가 도시의 폐쇄와 별다르지 않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페스트』에서 가장 밑바닥에서 시체를 처리하는 일을 하는 하는 사람이 절대 부족하지 않았던 것처럼 『전염병 연대기』에서도 마찬가지의 이야기를 하는데(“앞에서 말한 시체 운반 같은 일거리를 찾아다니는 빈민들이 굉장히 많았던 까닭에 매장 인부의 인원 보충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72쪽), 시대가 흘렀으나 전염병 시대의 하층민은 대응을 달라질 수 없었다는 데 안타까움이 더하다.


다니엘 디포는 페스트의 원인을 ‘병균’이라고 적시하면서, 레이우엔훅에 의해 미생물이 발견된 이후이지만 아직은 파스퇴르와 코흐의 세균병인론(germ theory)가 나오기 전임에도(디포의 시점에서도) 이 질병이 단순히 어떤 기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생명체에 의한 것임을 인지하고 있는 듯 보인다. 또한 보인자(carrier), 즉 병원균을 가지고 있지만 질병이 드러나지 않은 사람이 감염질환을 퍼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어(320쪽) 상당히 놀랍다. 물론 질병의 전파와 관련해서는 아직 명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고, 가끔 ‘신의 섭리’를 운운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감염질환과 관련해서 상당히 진전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은 페스트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가 이 병으로 횡사한 수십 만 명의 죽음을 잊지 말자는 비망록(備忘錄)이다. 우리도 이제 코로나 19에 대한 비망록을 진지하게 적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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