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손더스는 절대 평범하지 않다. 거친 듯한데 정교하고, 기괴한 듯한데 처연하다.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을 그린 듯한데 결국은 세상의 일이다.
제목부터 궁금했다. 표제작의 제목이기도 한 ‘패스토럴리아’. 찾아보니 ‘패스토럴(pastoral)’에서 온 말이란다. 주인공이 근무하는(갇혀 사는?) 테마파크의 이름이다. 화자이자 주인공은 조악하게 재현된 선사시대 동굴에서 고대 인류를 재현하여 구경거리가 되는 역할이다. 그 역할로 가족을 부양하고, 아들의 수술비를 댄다. 그러나 아무도 구경거리인 자신을 보지 않고, 또 여자 동료는 영어를 쓰고 담배를 핀다. 금지된 일이다. 물론 여자 동료도 절박하며, 그 절박함만큼이나 괴롭다. 그들은 갇혀 살지만, 스스로 원한 것이고 쫓겨나지 않기 위해 분투한다. 주인공은 관리인의 요구와는 달리 동료 평가를 하며 아무 이상이 없다고 쓰지만, 결국은 관리인이 원하는 내용을 쓰고 만다. 이쯤 되면 ‘패스토럴리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짜 동굴 속 가짜 동굴 인간이 무얼 의미하는지 분명해지지 않는가? 우리가 사는 세계. 테마파크와 다를 바 없는 불쾌함의 세계. 그러니까... 현실이다.
뭔가 심상치 않은 세계는 이어진다. 이모와 누나들과 어린 조카들과 살아가며 스트리퍼로 생활을 영위해나가는 <시오크>도 그렇다. 평생을 자신을 위해 살아가지 않으면서 늘 낙관적이던 이모가 침입한 도둑에 놀라 죽었을 때, 죽은 이모가 무덤에서 사라져 난데없이 집으로 찾아와 조카들에게 제대로 살아가라고 한다. 그런데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선 스트리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내던져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아니 현실이다. 조지 손더스가 인식하고 있는 미국 하층 백인 가족의 현실이다. 그 현실은 <이발사의 불행>에서도 이어진다. 자존심과 허상의 세계다. 우리는 이발사를 불쌍하게 여겨야할지, 우습다고 여겨야할지 곤란하다. 아마 둘 다일 거다. 우스우니 불쌍하다. 불쌍하니 화가 난다. 조지 손더스의 유머는 이런 식이다. 어느 한 곳에서도 시시껄렁한 우스갯소리를 하지 않지만 다 읽고 나면 그게 유머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