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새로운 집권 세력은 어떤 형태로든 약속을 하면서 등장한다. 그게 독재든, 전체주의든 상관없다. 아니 그런 경우 더 큰 약속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붕괴하는가? 바로 그 약속 때문에 붕괴한다. 아마도 처음부터 지키지 못할 약속, 아니 지킬 생각이 별로 없었던 약속, 혹은 지킬 수 없게 된 약속 때문이다. 지키지 못한 약속은 통치를 받는 이들보다 통치를 하는 세력들 사이에 균열을 가져온다. 약속은 동일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방식은 정말 많기 때문에 자신이 지키지 못한 약속을 덮기 위해서라도, 다른 경쟁자가 지키지 못한 약속을 공격한다. 서로 공격한다. 그렇게 권력은 붕괴한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증언들』을 이렇게 읽는 것이 과연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내지는 타당한 것인지 자신이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에서 명백히 그런 역사를, 그런 통찰을 읽었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자신의 대표작 중의 대표작 『시녀 이야기』를 발표한 것은 1980년대의 한복판이었다. 그녀가 그 시대를 어떻게 보았는지는 『시녀 이야기』에 잘 드러난다. 『시녀 이야기』를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으니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큰 시각으로 ‘권력’에 대한 소설이라고 보는 편이 더 합당한 평가라 생각한다. 그 권력에는 ‘성(性)’이 당연하게 포함되어 있을 뿐이고, 거기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시녀 이야기』 이후 34년 만에 『증언들』을 내놓았다. 『시녀 이야기』의 음울함은 조금 걷혔다. 소설보다는 소설에서 나온 드라마의 후속작이라는 점을 더 신경 쓴 듯도 하다(소설에는 없지만 드라마에는 등장했던 설정이 『증언들』에서는 이어지고 있으니). 『시녀 이야기』가 성을 억압하는 권력의 출현으로 개인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또 얼마나 위선적인 권력이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면, 『증언들』은 그 권력이 어떻게 붕괴되었는지에 관해 보고하고 있다. 권력의 붕괴는 그 권력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이가 깊게 관여했다.
소설에선 한 인물의 회고록과 두 인물의 증언 녹취록이 번갈아가며 상황을 전개시킨다. 그들이 서로 이어지리란 것은 소설의 문법상 당연한 것이지만, 그걸 미리 예견한다고 해서 소설의 긴장감이 줄어들진 않는다. 『시녀 이야기』에서의 날 선 문제의식이 조금은 다듬어진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여러 명칭이나 대화에서 등장하는 언어 유희(혹은 언어 활용?)은 『시녀 이야기』에서보다 훨씬 날카로워졌다. 그저 해박함이나 재기를 자랑하는 차원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서 무엇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다.
21세기에 길리어드와 같은 국가의 출현이 말도 되지 않는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자신할 수 있는가? 신정국가를 표방하는 국가나 세력은 지금도 있으며, 그렇지 않은 국가마저도 신앙에 과도한 국가적 가치를 부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바로 길리어드가 출현한 바로 그 지역도 의심스럽다. 『시녀 이야기』를 썼던 1980년대에서 35년이나 지났지만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사회, 국가에 마거릿 애트우드는 자신감을 얻고, 혹은 『증언들』을 썼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