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혹스러웠다. 첫 번째 단편 <프러시안블루>를 읽으면서도 그랬는데, 두 번째 단편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은 더욱 그랬고, 세 번째 단편 <심장의 심장>도 그랬다. 이게 소설이라고?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독가스를 만들어낸 과학자들에 대한 <프러시안블루>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해를 처음으로 구한, 그것도 제1차 세계대전 참호에서, 아인슈타인에게 해를 구한 결과를 편지 뒷면에다 적어 보낸 후 얼마 되지 않아 아마도 독가스의 여파로 죽게 된 카를 슈바르츠실트의 이야기를 담은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이나, 수학자 알렉산더 그로텐디크의 삶을 재구성한 <심장의 심장> 모두 차라리 과학 교양서의 한 챕터라고 하면 더 어울릴 듯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과학적 해석과 과학자의 삶을 그대로 다룬 이야기는 <심장의 심장>의 일본인 수학자 모치즈키 신이치에서부터 조금 균열을 보여주고(그러나 모치즈키 신이치는 실재하는 수학자다),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표제작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에서 비로소 소설 같아 보이고(물론 과학적인 내용과 관련해서는 과학 교양서에 손색이 없다), <밤의 정원사>에 이르러서는 진짜 소설이 된다.
그럼 이런 ‘소설’에서 과연 무엇을 읽어야 할까?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을 양자역학의 토대를 세운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를 중심으로 한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에서 찾아볼까 한다.
하이젠베르크는 행렬을 통해, 슈뢰딩거는 파동 방정식을 통해 양자역학을 만들어냈다(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좀 어렵다). 과학에서는 이 두 가지 방식이 양자역학의 서로 다른 측면에서 접근하는, 같은 해답을 내놓는다고 설명한다. 물론 하이젠베르크나 슈뢰딩거 모두 이야깃거리가 많은 삶을 살았기에 많은 과학 교양서에서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라바투트는 소설에서는 좀 더 달리 둘의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이젠베르크나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에 한 걸음 성큼 접근하여 불멸의 업적을 남기는 순간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소설은 그 순간이 전혀 논리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이젠베르크는 헬골란트에서 요양하며 극단적인 제약 속에서 간신히 그 길을 찾아냈고, 슈뢰딩거는 별 볼 일 없는 물리학자였지만, 결핵으로 인해 알프스에서 요양하는 와중 한 소녀와의 염문을 일으키며(그는 평생 염문 속에서 살았지만) 어찌어찌 파동 방정식을 고안해냈다. 또한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을 받아들일 수 없던 하이젠베르크가 낙심 끝에 불가사의한 경험을 하면서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견해낸 이야기도 이어진다.
이런 발견의 뒷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소설’인 셈인데, 소설가는 하이젠베르크나 슈뢰딩거, 드 브로이, 아인슈타인 등과 관련한 과학적 사실은 훼손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으로서 그들의 발견이 어쩌면 논리적이거나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소설’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이 소설집을 과학 교양서처럼 읽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이름을 처음 들었다. 이건 나로선 좀 불가사의하기도 한데, 어떻게 이런 인물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을까 싶기 때문이다. 실제로 찾아본 그로텐디크는 힐베르트와 함께 20세기의 대표적인 수학자로 여겨지고 있단다. 아니, 정말 그럴까 싶은데, 진짜 그렇단다. 이게 분명 소설로 쓴 이 책이 내게는 과학 교양서인 이유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