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魔)의 산’, 소설에서 이 표현은 단 한 차례 등장한다. 결핵 국제요양원 베르크호프는 주로는 '이 위'라는 표현으로, '평지'와 대비되는 세계를 의미했는데, 소설의 끝부분 1차 세계대전이 발발을 알리면서 "마(魔)의 산에서 7년 동안이나 잠자고 있던 한스 카스토르프를 문밖으로 거칠게 내던져 버린 벽력"이라고 하고 있다. 그곳에 은거하면서 인식하지 못했던 '마성(性)을 전쟁의 발발로 비로서 깨닫게 된 것처럼.
이 작품은 모순되고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고뇌에 관한 기나긴 토로처럼 읽힌다. 한스 카스토르프라는 독일 청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나, 소설 속의 많은 고민과 갈등은 그의 선생 격인 세렘브리니와 나프타의 격정적인 토론에 의해 나타난다. 서로 대비되는 두 사람의 철학은 매우 화려해 보이고, 격렬해 보이나 (내 생각엔) 정리되어 있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둘의 언설은 모순된 면이 적지 않은데, 마치 그것이 당시 시대 상황이 혼란스럽고, 철학이 정립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래서 한스 카스토르프가 전쟁이 발발하고 7년 만에 산을 내려가게 되는 것이 기다긴 모색 끝에 차분히 정립되어간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여전히 혼란스럽고 정립되지는 않았지만 시대가 그를 불러낸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그것은 삶과 죽음, 진보와 보수 등의 대립에 대한 답이 쉽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보이는데, 복잡한 생의 문제에 관해서는 삶의 현장을 떠나서 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어쨌듯 현장에서 찾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1권에서 하룻밤의 고백 후 떠났던 쇼샤 부인은 다시 돌아온다. 당연히 그 사랑이 어찌 될 것인가 궁금한 것이 독자의 통속적인 관심사이지만, 토마스 만은 그 부분에서도 냉정하다. 쇼샤 부인은 페페르코른이라는 거부와 동행하고 있었고, 한스 카스토르프는 애간장을 태우게 된다. 그러나 페페르코른에 관해 존경까지 하게 되고, 또 페페르코른은 청년의 사랑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페페르코른이 자살로서 생을 마감하는데, 뜻밖에도 그 장면 이후 한스 카스토프르와 쇼샤 부인의 관계는 소설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러고 보니, 병(결핵)을 소재로 한 소설이기도 하지만, 소설 속에서 죽음은 일상적이다. 사촌 요하임 침센의 죽음, 페페르코른의 죽음, 나프타의 죽음, 그리고 포탄 속에서의 한스 카스토르프의 죽음.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은 생(生)보다 죽음에 더 끌리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죽음은 결국 ‘살아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으면 가능한 게 아니다. 그토록 치열한 논쟁을 지켜보는 것도 삶에 대한 의지가 없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어쨌든 그 논쟁이 이 소설의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비록 그 끝은 죽음일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