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뒷부분에서 하루키는 느닷없이(?)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라는 소설 얘기를 한다.
“그의 이야기에는 현실이 비현실이,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이 한데 뒤섞여 있어.” 그녀는 말했다. “마치 평범한 일상 속의 일들인 것처럼.”
“그런 걸 매직 리얼리즘이라고들 하더군.” 내가 말했다.
“그렇지. 하지만 비평적 기준으로는 매직 리얼리즘일지 모르지만, 가르시아 마르케스 자신에게는 이런 이야기 방식이 지극히 평범한 리얼리즘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해. 그가 살던 세계에서는 현실과 비현실이 지극히 일상적으로 혼재했고, 그런 풍경을 보이는 대로 썼던 게 아닐까.”
어색한 장면이다. 내용이 그런 게 아니라, 별로 문학에 조예가 깊어 보이지 않은 역 앞 이름 없는 카페의 30대 여주인의 입에서 나온 얘기라서 그렇다. 그만큼 하루키는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이 이야기가 바로 그런 얘기라는 것처럼. 분명 비현실적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그게 바로 리얼리즘이라는...
현실과 비현실이 오간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전개되면 될수록 어느 쪽이 현실인지, 어느 쪽인 비현실인지가 애매해진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열여섯, 열일곱 살 풋풋한 감성으로 소녀를 만나 연정을 품었던 이야기가 현실이고, 어느 순간 벽이 높게 쳐진 도시에 들어가 그림자를 떼어 놓고 ‘꿈을 읽는 일’을 하게 된 것이 비현실 같아 보인다. 그러고는 그림자가 도시를 탈출하는 데, 그 후의 얘기는 내가 갑자기 그 도시 밖으로 나와 회사를 다니고, 시골 마을의 도서관장이 되고 하는, 멀쩡한 현실의 얘기처럼 보인다. 물론 여기서도 죽은 사람과 얘기를 나눈다든가 하는 비현실적인 얘기가 있지만, ‘나’라고 하는 인물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다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이야기가 된다. ‘나’는 여전히 그 도시에서 ‘꿈을 읽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이고, 그림자는 무엇인지가 불분명해지는 것이다.
바로 그런,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하루키는 얘기하고 싶었으리라 짐작한다. 마치 ‘호접몽(胡蝶夢)’처럼 말이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 즉 지금 이렇게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이 점하고 있는 세계가 과연 ‘나’라는 인간의 본질이 속해있는 세계인가, 아니면 또 다른, 아니 진짜 나의 자아가 다른 세계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런 질문을 던지기는 하지만, 실은 그런 질문이 별로 의미 없다고도 얘기하는 게 이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어느 쪽이 진짜 ‘나’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것처럼, 그런 구분이 실상은 가능하지 않은지도 모르는 것이다.
거의(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다) 유물론자인 내가 보기엔, 이 소설은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쓰레기는 아니다. 충분히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내가 ‘거의’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듯이, 어떤 의심 같은 것이 존재하니까 말이다. 하루키는 그 의심을 극대화시켜서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제목이 ‘도시의 불확실한 벽’, 혹은 ‘도시와 불확실한 벽’이 아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라고 ‘그’라는 글자를 넣었다. 도시 자체가 불확실한 벽이라는 의미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진짜 ‘나’이든, 혹은 상상 속에 존재하는, 보조적인 분신의 ‘나’이든, 내가 존재하는 도시가, 말하자면 ‘불확실한 벽’이라는 의미다. 어느 쪽이 진짜 ‘나’의 존재인지가 불분명하고, 아니 그 구분 자체가 의미가 없듯, 그런 도시의 존재조차도 불확실하다. 우리가 세울 수도 있고, 무너뜨릴 수도 있는 세계인 셈이다. 소설 속의 ‘나’(이름도 없다)는, 그리고 비상한 계산 능력과 독서 능력을 가진 서번트 증후군의 소년(역시 이름이 M**으로 가려져 있다)은 그런 도시를 세웠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 도시를 벗어난다. 그 도시에 존재하고 있던 ‘나’가 본체라면 그림자가 ‘나’의 행세를 하면서 도서관장 일을 하고 있는 그곳으로 와서 합쳐질 것이다. 만약 그 반대라면 비현실의 내가 현실의 나를 다시 찾아가는 것일 것이다. 결국은 역시 현실과 비현실이 갈렸다가 다시 이어지는, 그런 이야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