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읽은 게 분명한 소설. 아마 연합 써클(예전엔 동아리를 그렇게 불렀다)에서 독서 토론을 했었을 거다. 어떤 얘기를 했었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아마 어떤 거창한 교훈 같은 것을 얘기했을지도 모른다. 헤르만 헤세 아닌가. 《데미안》 아닌가. 그리고 여학생도 참여하는 연합 써클이 아닌가.
다시 읽은 《데미안》은 시시하다. 이미 어떤 내용인지 대충은 알고 읽어서 그런가? 열 살 남짓에서 스물 살 갓 넘을 때까지 주인공의 성장을 담은 소설이다. 그 나이에 얼마나 대단한 걸 깨달았을까 싶다. 그 나이를 거치는 성장 소설이 다 유치하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 소설은 유치하지는 않다. 다만 시시할 뿐인데,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깨닫는 것들이 상당히 상식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아브락사스로 대표되는 선과 악, 밝음과 어두움과 같은 대비되는 것들이 함께 존재한다는 양면성은 상당히 존중할 수 있는 깨달음이긴 하지만, 그게 그저 작가의 사유에서 나오는 것으로 여겨질 뿐, 주인공들의 삶에서, 특히 삶의 경험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저 뿌리 없는, 추상적 사유에 그쳐버리는 느낌이 든다. 진지하지만 진지함을 가장하는 것 같고, 깊지만 깊음을 가장하는 것만 같다. 단지 표면만 긁어대며 제발 내 소리 좀 들어달라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마지막에 주인공이 깨달음을 얻는 데 진지한 경험이 바탕이 되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을 때의 장면이다. 그런데 거기서도 싱클레어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다기보다는 데미안을 통하는 듯하다. 지독한 수동성이다.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이 새가 알을 깨어야만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적극성을 강조하는 것과는 다소 멀게 느껴진다.
“새는 힘겹게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데미안은 없는 존재가 아닐까? 그는 그저 싱클레어가 가상으로 설정한 존재로 그가 어려움에 처할 때 기대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자 할 때 권위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로 상정한 것이 아닐까? 에바 부인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갈구하기 위해서 설정한 이상적인 존재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또 다른 이가 했을지도 모르겠다)
또 한 가지. 이 작품에서 헤르만 헤세가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에게 전쟁은 세계를 깰 수 있는 방법이라 여겼던 같다. 그는 전쟁으로 부서지고 새로 건설될 세계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역시 나는 긍정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