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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살인자)에게도 인생이 있다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by ENA

범죄자(살인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우리는 행위의 결과만을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하기 일쑤지만(법은 더욱 그런 것으로 보인다), 그게 늘 온당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남들이 내 행위의 결과만을 가지고 판단할 때, 그 부당함에 하소연하고 왜 그랬는지 의도와 과정을 참작해달라고 호소한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좀처럼 남의 행위에 대해서는 그런 태도를 취하기 힘들고, 더욱이 잔학한 범죄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변호사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가 11명의 범죄자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변호사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들의 오랜 과거, 어린 시절에서부터 이어져 온 삶의 경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건에 관한 건조한 이야기가 아닌,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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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들은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건 이야기가 꾸며졌다는 느낌이 아니라 이야기를 둘러싼 환경과 심리가 정교하고 풍성하다는 느낌이다. 그런 글쓰기의 정교함은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고, 처연함을 느끼게 하고, 혹은 기묘함을 불러 일으킨다.


끝까지 헤어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킨 탓에 무지막지한 아내에게 괴롭힘을 당하여 살다 끝내는 토막살인을 하게 된 노(老)의사 이야기, 너무나도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살다 사고 이후 온몸이 썩어가는 고통을 겪는 남동생을 죽여야만 했던 첼리스트 이야기, 심장발작으로 죽은 이를 여자 친구가 죽인 것으로 오해해 온갖 역경 끝에 얻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시체를 유기한 청년 이야기 등은 더할 나위 안타깝다.


끝내 아무런 인적 사항(심지어 이름도)을 알아내지 못한 (아마도) 킬러의 이야기라든가, 양의 목을 베고, 눈알을 도려낸, 그래서 사라진 여자 친구 살해 혐의를 받게 된 소년의 이야기, 발에 박힌 가시를 뽑는 조각상에 동화된 나머지 사람들에게 압정이 박히도록 한 박물관 경비원 이야기(그는 박물관의 소홀한 행정 처리로 순환 근무 없이 한 전시실에서 23년가 내리 근무했다)는 기묘하기 짝이 없다.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정신적인 문제가 생긴 것이었으며, 그들이 저지른 범죄, 혹은 저지른 것으로 오해받은 범죄는 그 탓이었다.


사건 의뢰를 철회하는 바람에 도중에 변호를 그만두어야 했던 사례는, 결국 변호를 거부했고, 정신치료 권고도 받아들이지 않은 청년이 2년 후 실제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처연하다.


이 이야기들은 법과 처벌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되묻게 한다. 이른바 법 기술자가 아닌 ‘인간’으로서 법을 다루는 법률가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저자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의 형법은 지은 죄의 책임을 묻는 형법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한 인간이 자신의 행동에 얼마나 책임을 질 수 있는가에 따라 처벌을 한다. 같은 죄라고 해도 그 배경에 따라 형량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복잡했다. 옛날에야 간단했다. 중세에는 남의 물건을 훔친 사람은 손목이 날아갔다. 오로지 범죄행위에 따라 처벌을 한 것이다. 돈 욕심으로 훔쳤든 배가 고파서 훔쳤든 아무 상관이 없다. 당시 형벌이란 일종의 수학이었다. 각각의 범죄행위에는 그에 딱 맞춤한 형벌이 정해져 있었다. 오늘날 우리의 형법은 좀 더 현명해졌다. 각자의 인생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처벌을 내린다. 또 그래서 어려운 문제이다. 은행 강도라고 해서 모두 같은 은행 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게 독일만의 오늘이 아니길 바란다.

이 책은 범죄자의 이야기를 어떻게 보여주고,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따뜻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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