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을 읽었다고 하는 사람을 대단하다고 여길 때가 있다. 그런 책 중에는 《율리시즈》가 있다. 대단한 소설이지만 읽기 쉽지 않다는 선입견이 있다. 그래서 대단하게 여기게 된다. 《율리시즈》를 쓴 아일랜드 출신(굳이 ‘출신’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다)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라는 소설가에 대해서는, 어찌 되었든 적지 않게 읽고 들었다. 하지만 그의 소설은 하나도 읽어보지 못했었다(좀 창피하다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그의 소설로 처음 읽게 된 소설이고, 또 그의 소설로 들어가는 관문으로도 적당한 소설이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제임스 조이스 자신의 이야기다. 주인공 스티븐 더덜러스가 바로 제임스 조이스이고, 그가 다닌 학교, 자라고 생활한 도시와 마을, 주변 인물들이 거의 실제로 존재한다. 소설 속 에피소드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유년 시절에서 20대 초반 예술가(소설가)로서의 미래를 결정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시점까지의 일과 생각을 스스로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유년기에서 청년기에 이르는 지적, 정치적, 종교적 편력과 함께 예술적 관점을 피력하고 있으며, 자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국가, 종교는 물론 가족까지 초월한 길로 나아가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잇다. 이 소설이 그의 나이 30대 초반에 발표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어떻게 보면 치기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야기는 다섯 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시간순이다. 시간순이긴 하지만, 각 장은 그 시기에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밋밋하게 서술하지 않는다. 특정한 에피소드 한두 가지에 집중하는 형식이다. 1장에서는 자신에게 남은 최초의 기억과 함께 여섯 살 무렵 클롱고우스 우드 학교라는 사립학교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린 학생이지만 그때부터 자의 의식이 강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크리스마스 만찬 장면에서는 당시(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아일랜드의 정치와 종교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당시에는 이해할 수도 없었던 이 갈등 상황은 조이스가 왜 정치와 종교를 초탈하고, 가족까지도 극복하려고 했는지에 관한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장에서는 아버지가 파산하고 클롱고우스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것을 알게 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더블린의 벨비디어 학교에 입학하고 우수한 학생으로 평가받지만 동시에 이단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반항적인 바이런을 테니슨보다 더 훌륭하다고 본 그에게 돌아온 것은 동료 학생들의 폭력이었다.
3장에서는 사창가에서 순결을 잃은 후, 그 때문에(물론 그것만은 아니었지만) 고민하는 스티븐이 그려진다. 그리고 아주 길게(지겨울 정도로) 아놀 신부의 지옥과 처벌에 관한 강론이 이어진다. 기가 질릴 정도다. 이렇게 기가 질릴 정도로 위협(!)한다면 당연히 어린 학생은 겁이 날 것 같다. 스티븐은 결국 고해 신부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하기에 이른다. 이 부분만 보면 제임스 조이스가 종교의 가르침에 굴복하고, 종교적인 인물이 되었겠구나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예상은 4장에 이르러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학에 진학하고 여러 고민을 하는데, 그 고민의 끝은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미래에 대한 정립이었다.
스티븐 디덜러스는 독서와 사유, 그리고 대화를 통해 현실을 거부하게 된다. 우선 아일랜드라는 자신의 조국을 거부한다. 이는 나아가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의 거부르는 보편적 사고로 이어진다(그래서 아일랜드의 민족주의를 거부한 제임스 조이스를 아일랜드에서 추앙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또한 종교를 거부한다. 가족(특히 어머니)의 종교였던 가톨릭의 의식을 거부함으로써 보다 자유로운 세계를 추구한다. 그런 종교에 대한 거부는 자연스럽게 가족에 대한 거부로 나아간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를 말해 주마. 내가 믿지 않게 된 것은, 그것이 나의 가정이든 나의 조국이든 나의 교회든, 결코 섬기지 않겠어. 그리고 나는 어떤 삶이나 예술 양식을 빌려 내 자신을 가능한 한 자유로이, 가능한 한 완전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할 것이며, 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 있는 무기인 침묵, 유배 및 간계를 이용하도록 하겠어.” (379쪽)
그는 예술가로서의 길을 유배(流配)라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더덜러스, 즉 그리스 신화의 장인 다이달로스로 정한 것도 무척 의미심장하다. 이 소설은 자서전이면서 성장 소설이면서, 일종의 선언문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