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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스 Aug 31. 2018

‘나’를 지키기 위한 마음가짐

이제 조금씩 준비를 하셔야 해요.

몸도 마음도.



의사 선생님의 말이 끝나는 순간 겁이 덜컥났다.

이제 정말 엄마가 되는구나.

되어야만 하는구나.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었던 것이 많아서 결혼도 임신도 한참 뒤로 미뤄놓았었다. 인생 주기에 해야할 일을 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채근과 의심을 견디기가 힘들어 질 때쯤 신랑을 만났고, 아이를 가졌다. 하지만 아직도 ‘ㅇㅇ어머님’ 이라는 호칭은 익숙하지 않고, 병원에서 불러주는 ‘ㅇㅇ산모님’ 정도에만 꾸역꾸역 적응이 된 중이다.


주말 늦은 아침까지 거실에 누워 이젠 이 여유도 마지막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로 향했던, 나의 욕구에만 예민했던 모든 촉을 이제는 오롯이 내 아이에게 향하게 하고 곤두세워야 할 것이다. 파스타가 먹고 싶다고 갑자기 요리를 할 수도 없을 거고, 어제처럼 팥빙수가 먹고 싶다고 신랑을 졸라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집 앞 빵집에 나가는 일도 이제는 없겠지. 생각하니 괜히 서럽고 억울했다.


임신 기간 내내 하지 말아야 할 것과 먹으면 안되는 것들 즉 금지된 사항들을 지키지 못했다. 아니, 안했다. 커피는 먹던대로, 폭력이 난무하는 액션 영화도 보던대로, 회도 치킨도 콜라도 아이스크림도 잘 먹었다. 누구는 과일조차 예쁘게 생긴 것만 먹으라던데 나는 늘 그랬듯 귀찮아 하며 껍질째 씨앗째 잘도 씹어먹었다. 그래놓고 문득 마음 한 켠에 바람처럼 지나쳐가는 죄책감을 적당히 비웃으며 손등으로 확 쳐냈다. 설마하면서.


서점에서 똑똑한 육아, 현명한 엄마, 준비된 맘. 등등등 태교, 출산, 육아 서적들의 목차를 들쳐보다가 좌절감에 휩싸였다. 다들 엄청나게 준비하고 공부하고 반성해가면서 엄마 노릇하려고 애쓰는데 난 뭘 하고 있었나. 손에 든 별다방 라떼를 방금 전 까지만해도 맛있다며 마셨던 내가, 밤새 잠을 안자고 우는 아이를 붙들고 임신 기간 내내 커피를 마신 자신을 자책했다던 책 속 여자처럼 나도, 울고 가슴을 치고 머리를 쥐어뜯게 될까. 엄마가 먹는건 아니 피부 상태나 성격과는 전혀 상관없대. 누구라도 말해 줬으면. 이럴 땐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정보가 쏟아지는 지금의 테크놀로지가 싫다.




 

답답한 마음에 위로나 받을까하여 예비맘 강의란 걸 들었다. 입구에서 부터 줄을 길게 서서 개인 정보를 주고 동의서 몇 개에 사인을 했더니 기저기, 분유, 세제, 손수건 샘플들을 마구 넣어줬다. 백 여명이 넘는 배불뚝이 임산부들이 한 곳에 모여있는 풍경이란, 생각만해도 우스웠다. 엄마들을 대상으로 하는 출산, 육아, 교육 업체가 이렇게나 많았다니. 그리고 이렇게 돈 쓸 데가 많다니. 놀랍고 무섭고 걱정됐다. 2시간동안 진행된 업체들의 광고성 강의가 끝나고, 경품 행사가 있었다. 유모차나 아기띠, 출산용품 등 고가의 공짜 운은 역시나 없었다. 수 십장에 써내려간 내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지우고 싶어졌다. 괜히 억울해졌다.



마지막을 즐겨

이제 헬 게이트가 열릴거야.



육아 선배이자 대학동창이 배를 만지며 말했다. 아이가 나올 준비를 하면 통증이 어떻게 오는지, 병원에 가기 전에 햄버거를 꼭 먹어야 한다든지, 힘을 줄때 절대 치아를 꼭 물지 말라든지. 인간이 느끼는 최고의 고통이래 진통이. 그러면서 남들 다 하니까 할 수 있다는 그녀의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겪어보지 않고서는 모를 일이다. 얼마나 아플지 고통스러울지 무서울지.






결국 산후 도우미는 신청하지 않았다. 대신 유튜브에 있는 모든 신생아 돌보기 관련 영상을 열심히

보고 익히는 중이다. 어차피 도우미는 잠깐 왔다 가는 사람이고, 아이를 키우는 건 결국 나니까. 내가 엄마니까. 처음이라 어렵겠지만 하다보면 되겠지. 나를 믿고 준비해보기로 했다. ‘훌륭하고 똑똑한 엄마’는 자신 없지만 ‘든든하고 따뜻한, 좋은 엄마’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D-7

시간이 더디고도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두근두근.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이 낯선 시간들을

이만하면 잘 견디고 있다고 위로하며 지내자.


난 엄마가 되어도,

여전히 나니까.

나는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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