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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스 Oct 29. 2019

다행인 날들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상이 아주 작은 일로 깨져버리면 그 루틴함이 얼마나 소중하고 안정감을 주는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늘 똑같이 47분에 집을 나서 59분쯤에 지하철 입구에 들어서서 13분에 도착하는 지하철을 타는 일상.


오늘은 미세먼지가 심하다는 예보가 생각나  가던 길에 서서 마스크를 찾다가 20초 남짓 지체했고. 그 바람에 횡단보도를 급하게 뛰어 건너야 했으며, 또 그 바람에 급정거하는 차 주인과 아주 짧지만 강한 눈싸움을 했다.


지각하지 않는 시간까지의 특정 지하철을 타기 위한 이른 아침의 분주함.

그 열차의 출발 시간,  시 몇 분이란 숫자 몇 개에 목숨이 걸린 듯 움직이는 나를 보고 있자니. 누가 인간 따위를 고귀한 존재 어쩌고 하며 찬양했던 것인가 하며 코웃음을 치게 된다.  


생각지도 꿈꾼 적도 없는 른여덟의 11월의 그림이다.  

이러려고 내가. 겨우 이러려고 이렇게. 하는 소리가 입버릇처럼 나오는 우울한 서른의  끝자락.   

공부가 아니면 죽을 것 같이 굴어놓고 공부밖에 할 줄 몰라 죽지 못해 사는 삶이라니.   

공부한다고 유세 떨었던 고3의 하루가 떠올랐다.

 새벽 1시 독서실에서 돌아오는 딸내미를 마중 나온다고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두 정거장을 걸어온 엄마.

 추운 겨울. 나는. 전기장판 방석에 앉아 내내 꾸벅 졸다가 약속한 시간을 30분이나 훌쩍 넘겨 돌아오던 길이었다.  

 

미안했어. 그때 그렇게 밤새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지금 또 이렇게 밤새 일하고 밤새 글을 쓰나 봐.

 



 사람 마음이란 게 간사해서

 또 어느 날은 이런 루틴 한 삶이 감사할 때도 있다.


몸에 힘이 없어 터덜터덜 걸어가는 날, 숫자에라도 맞춰 걸으면 어느새 회사에는 도착해 있고, 어느새 일은 시작하게 되어있었다.


무탈한 하루.  무사한 하루. 별일 없는 하루.

그래서 다행인 날.


자질구레한 습관이 만든 일상의 리듬이

끊기지 않고 전곡이 플레이 된 날.


어쩌면 인간이 별 볼일 없는 존재인 것처럼. 우리가 바라고 꿈꾸던 그 어떤 행복이란 것도 특별한 것이 아니지 않을까.


평범해서 다행인 시간.

다행인 하루.


다시는 오지 않을 이천십구년 월 이십구일.


다행이다.

다시 오지 않을 오늘.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도 겪고 싶지 않은 일도

정말 아무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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