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1년 차, 그리 춥지는 않던 겨울날이었다. 직속 과장님이 팀장님 호출을 받았다.
그리고 팀장실에서 한 시간 정도 있다가 나오셔서는 "나 내년부터 다른 부서로 간다"라고 말씀하셨다. 쏟아지는 업무에 우산 역할을 해주시던 직속 과장님은 그렇게 다른 부서로 가셨고, 예상했던 대로 그 후 3년간의 회사 생활은 정말 지옥 같았다.
3년 동안, 나의 최소 근무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 까지였다. 회사 특성상 긴급호출이 종종 있는 편인지라 야간이나 새벽에 회사에 들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다시 말해 그런 돌발 근무를 제외한 '최소'근무시간이었다. 12시간 이상 근무는 일상이었고, 가끔 7시쯤 퇴근을 할 때면 너무 어색해 하곤 했다.
'지금 퇴근해도 되나...?' 마지막 순간까지 찝찝해하며 퇴근을 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정신없이 살던 때에 내가 가장 듣기 싫었던 질문은
"넌 뭐하는데 그렇게 바빠?"였다.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할 말이 없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100가지 일을 한 것 같았지만 그중 99개 정도는 이 일을 했다고 설명하기엔 구차해 보이는 어떤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왜 시킨 일을 못하고 있는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하지못했다. 바빠 죽겠지만 정작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아이러니를 매일 느꼈다. 눈코 뜰 새 없이 일하고 퇴근을 할 때면
'오늘 하루도 정말 고생했다'는 생각보다
'대체 내가 오늘 하루 종일 뭐했지?'라는 생각만 들곤 했다.
떠나가는 동기
1년 차, 정말 친하게 지냈던 동기가 있었다. 다른 부서였지만, 저녁시간에는 서로 항상 남아 있었기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곤 했다. 동기도 똑같은 얘기를 했다. 대체 자기가 뭘 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렇게 항상 같이 식사하던 동기는 언제부턴가 식욕이 없다며 식사를 거를 때가 많아졌다. 힘들어 죽겠다고, 우울하다며, 병든 병아리처럼 어깨가 처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말을 내게 했다.
"형, 나... 어제 되게 신기한 일이 있었어"
" 뭔데? "
" 어제 사무실 올라가다가 노을 지는 걸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
"야 왜이러노..."
제일 친했던 그 동기는 그렇게 말하고 한 달 정도 뒤에 퇴사를 했다. 그 친구가 1년 차에 퇴사 전까지 겪던 감정과 행동 변화의 과정들을 나는 과장님이 떠난 2년 차에 똑같이 경험했다. 스트레스성 폭식, 스트레스 과부하로 식욕 저하, 우울증과 무기력증 심화... 그리고 나 역시 그 우울한 감정의 끝에서 이유 모를 눈물을 경험해 보았다. 다른 동기들도 같은 과정을 겪었는지는 모르지만, 5년 차인 지금까지 동기 11명 중 5명만 회사에 남아 있다. (다행히 퇴사한 동기들은 모두 다 잘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버텨서 내게 남은 것은?
어찌 되었건 그렇게 힘들었던 과거는 옛날 얘기가 되었고, 지금은 어느 정도 정상적인 생활은 하고 있다. 위의 얘기들은 2년 차 ~ 4년 차 때 얘기이다. 예전보다 균형 잡힌 생활이 가능한 것은 내가 일처리에 좀 더 능숙해진 덕분이라 생각한다. 예전에는 한 가지 일을 두 번, 세 번의 과정을 거쳐서 처리했다면 지금은 두세 가지 확인하는 것을 한 번의 과정으로 끝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 오랜 시간을 버티며 대체 나는 무슨 발전이 있었을까...?'
능숙해졌다는 것은 단지 그 환경에 익숙해졌다는 것뿐이지 스스로 발전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죽도록 고생해서 발전한 것이 없다면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버텨왔을까...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문득 떠오르는 것은
1. 급격히 노쇠한 몸 : 30 초반에 할 말은 아니지만, 왜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고 하는지는 알 것 같다
2. 약간의 재산 : 돈 1억을 모은다는 게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구나
3. 가정의 평화 : 나의 작은 고생으로 모두가 웃을 수 있다면 인고의 시간이 충분히 가치가 있을 수도 있겠다
이렇게 3가지가 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몸 생각 않고 끈질기게 버텼다'는 것이다.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면 너무 슬프기에
하지만, 정말 남은 게 이것밖에 없다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 스스로 타협하기로 했다. 발전이라는 것이 무언가가 쌓여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라면, 능숙해지는 것은 무언가를 옆으로 쌓아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높아지진 못했어도 넓어지긴 했어' 라고 혼자 타협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나름 가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더 많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좀 더 많은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더 인내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높게 쌓으려면 기초가 더 넓고 단단해야 하는 것처럼, 그 시간들은 내 인생에 기초를 다지는 시간이었어. 발전하지 못해도 괜찮아. 그 시간을 버텨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시간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