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전부터 나는 치(명적인) 질(환)을 앓아 왔다. 하필 일이 가장 바쁜 4월~6월에 물린 탓에 4월은 치질을 참느라 고생했고 5월은 수술하고 아파서 고생을 했다.
치질 수술을 하면 여러 가지 힘든 점이 있지만, 그중 하나를 꼽자면... '변 처리 문제'가 되겠다. 간단히 말해 수술 후 보름 정도는 변을 힘 줘서 누는 것이 아니라 앉아 있으면 그냥 흘러내린다는 것이다. 흘러내리는 것조차 너무 아파서 힘은 줄 엄두를 못 내는 것이다. 치질 수술을 해본 사람은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문제는 그냥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는 수 밖에는 없기에 한 번에 일을 끝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침에 2~3번 변처리를 하고 나면 회사 출근을 하기도 전에 온 몸에 기운이 다 빠지게 된다. 내 사정이야 어쨌든 회사가 바쁜 시기인지라 입원한 날 빼고는 계속 야간근무, 주말출근을 했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다가 5월 중순경 갑자기 '슬럼프'라는 녀석이 찾아왔다.
정말 갑작스러웠다. 그 날 갑자기 온몸에 힘이 없고, 신경은 곤두서 있고, 무기력증에, 속 쓰림에, 자도 자도 피곤하고, 식욕도 없고, 우울하고, 아침에 출근할 때면 심장도 빨리 뛰고 그랬었다. 슬럼프야 가끔씩 오곤 했지만, 문제는 이렇게 심하게 일주일이 넘게 증상이 지속된 적은 처음이었다. 앞으로 3주는 더 야간근무, 주말출근을 해야 하는데, 계속 이러면 어쩌지, 열심히 해야 하는데... 하는 걱정이 더해지면서 증상은 더 악화되었다.
주변 몇몇 사람들에게 얘기를 해보았지만, 힘내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물론 좋은 의도로 해준 말이었겠지만 이번 일을 통해 현실이 힘들어 지친 사람에게 힘내라는 말이 얼마나 쓸데없는 말인지 알게 되었다. 위로의 말을 나쁘게 받아 들일 필요는 없다 생각하면서도, 힘들어 죽겠으면 쉬어야지 쉬지도 못하는 상황에 힘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예를 들어
"친구야, 나 장염 때문에 3일을 굶었더니 배고파 죽겠다"
"그래? 배고플 땐 고기가 최고지. 고기를 먹어봐"
먹는게 불가능해서 힘든 사람에게 먹어서 힘내라는 것과 같은 것 같았다. 힘들면 그냥 쉬는게 답이다.
힘내지 않아도 괜찮아
그렇게 일주일 넘게 고생하며, 자신에게 계속 물어봤다. '슬럼프가 도저히 나아질 것 같지가 않은데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도저히 일을 정상적으로 못하겠는데 어떻게 힘을 내서 일을 할지, 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지, 계속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그렇게 계속 질문을 하며 내린 결론은...
'힘내지 말자'였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을 극복하고자 억지로 힘내지 않기로 했다. 힘내서 일하지 않기로 했다. 힘내서 극복하려 하지 않기로 했다. 왜 힘내지 못하냐고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는 '버티기만 하는 것도 너무 힘이 들고, 버티기만 하는 것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힘을 내지 말고'버티기만 하자' 고 다짐했고, 오로지 버티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가능한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고, 가능한 범위 내로 늦게 출근했다. 근무시간에 잠 오면 졸고, 현장 확인은 욕먹지 않을 정도만 했다. 또급하지 않거나 힘든 일은 뒤로 미루고, 실제로 피곤했지만 더 피곤한 척하고, 힘들면 사람들에게 푸념도 하고 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고, 눈치도 보이고 그랬다. 하지만 마음은 한결 편했다. 잘하지 않기로 다짐했기에 힘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버티기에 모든 힘을 쏟고 있는 자신을 다독여 줄 수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후, 슬럼프라는 녀석은 갑자기 찾아온 모습 그대로 갑자기 떠났다. 조금씩 좋아진 게 아니라 갑자기 컨디션이 정상 범위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만약 누군가 저와 비슷한 슬럼프를 겪고 있다면, 현실이 너무 힘들다면, 어떻게 힘낼지 걱정하지 말고, 왜 이 정도로 힘들어하지 하며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말고, 그 시기를 버티기에만 집중해 보는 것은 어떨까. 왜냐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