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의 '어머님께'는 개인적으로 즐겨 부르던 노래는 아니다.
노래 뒷부분의 결말이 비극적이라 즐겨 부르기에는 뭔가 죄스러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 때는 코인 노래방에서 가끔 부르기도 했지만 3절 부분은 부르지 않고 취소를 했었다. 어른이 된 지금, 사실 다른 가사는 크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게 있어 G.O.D의 어머님께는 한 파트만 계속 생각이 나는 노래이고,
그 파트만 흥얼거리곤 한다.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야이야이야아~ 그렇게 살아가고 그렇게 후회하고 눈물도 흘리고
야이야이야아~ 그렇게 살아가고 너무나 아프고 하지만 다시 웃고
- G.O.D '어머님께' 중 -
초등학생 시절, 우리 마을에는 '피자델리'라는 피자집이 있었다.
우리 마을엔 처음 생긴 피자집이었고 당시에 굉장히 핫한 곳이었다. 피자라는 음식은 순식간에 친구들 사이에서 핫이슈가 되었고, 나는 대체 피자가 뭐기에 저렇게 까지 맛있다고 하나 싶었다. 나는 며칠 동안 어머니를 조르고 졸라서 결국 어머니, 동생과 함께 피자가게를 갔다.
처음 먹어본 피자의 맛은... 이 세상 맛이 아니었다.
나와 동생은 정신없이 피자를 먹었다. 어머니는 우리가 먹는 모습을 웃으시며 지켜보시기만 했는데, 두 조각 정도 남았을 때 나는 괜히 머쓱했는지
'엄마는 안 먹어?'
하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어머니는 '엄마는 피자 싫어해'라고 대답하셨다. 그때 난 피자는 짜고 기름진 음식이고 어른들은 치킨, 피자 같은 음식은 좋아하지 않으시는구나라고 이해했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쯤에는 피자는 보편적인 음식이 되었다. 그때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야식으로 피자를 시켜 먹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어머니도 오셔서 한 조각씩 드시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피자를 드시는 게 아까워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건만, '엄마 피자 싫어하지 않아?'라고 물었다가 남은 피자 대신 욕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난 그때까지 정말로 어른들은 피자 같은 음식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
그 후로는 피자가 올 때마다 어머니도 함께 들곤 하셨다.
그렇다. 사실 우리 어머니는 피자를 굉장히 좋아하셨던 것이다.
어렸을 적 나는 우리 집이 무척이나 가난하다 생각했다.
내복, 속옷은 항상 기워입었고, 연필은 정말 닳아 없어질 때까지 사용하곤 했다. 그 흔한 장난감도 우리 집엔 별로 없었고, 하나둘씩 컴퓨터를 장만한 친구가 늘어날 때면 그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친구 집에 가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집에 와서는 컴퓨터를 가지고 싶다고 어머니께 조르곤 했다.
'컴퓨터는 게임만 하는 게 아니예요. 컴퓨터를 사준다면 나는 열심히 컴퓨터 공부를 할게요~!!'
나름의 논리로 어머니를 설득하려 했지만 역시나 먹히지 않았다. 그렇게 초등학생 시절이 지나 중학생이 되었고, 선생님이던 삼촌이 폐기하려 했던 학교 컴퓨터를 가지고 와 설치해줘서 처음으로 내 컴퓨터가 생겼다.
다 커서 생각해 보니 우리 집은 돈이 풍족했던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가난하다고 할 것 까지는 아니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각자의 가게를 운영하시며 맞벌이를 하셨었고, 촌동네라도 그때는 사람들이 좀 있었던 터라 장사가 안되진 않았었다.
어렸을 적 어머니께서 그렇게 악착같이 사셨던 이유는 건물을 마련하겠다는 목표를 위함이었다. 그 목표를 위해 오랜기간 아끼며 사셨고, 빚을 갚으신 덕분에 온전한 당신의 목표를 이루실 수 있었다. 그 빚을 다 갚은 것이 불과 몇 년 전이었던 것으로 안다.
비록 촌동네에 작은 건물 하나지만 그래도 건물주가 되셨고, 이제는 곧 연금을 받아 타실 것이고, 아들 며느리들 용돈 받아서 당신의 노후를 즐기시면 되겠건만, 어머니께선 아직까지도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으려 하시던 신발가게를 운영을 계속하며 당신의 용돈을 벌고 계신다.
이런 어머니의 모습이 참 감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애잔한 마음이 든다.
어머니가 앉아 계시는 가게의 방은 0.5평 남짓 된다.
손님을 기다리며 그 좁은 곳에서 하루의 반을 앉아 계시고, 그렇게 35년 세월을 살아오셨다. 식사를 하시다가 가게 벨 소리라도 나면 식사를 멈추시고 가게로 가신다. 그리고 손님이 가면 식은 식사를 마저 들곤 하신다. 어머니께선 식사를 빨리 하시는 편인데, 언제 손님이 올지 모르니 식사를 빨리, 대충 하시며 살아오신 탓이다.
이제는 효도하겠다고 그곳에서 나오시라 말씀드리지만, 아직도 습관처럼 스스로 그 좁은 곳에 들어가길 자처하신다. 예전에는 그래도 손님 찾아오는 재미라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인구가 다 빠진 작은 촌동네에서,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
가족을 위해 당신의 반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신 모습이,
또 계속 그렇게 자식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사시려고 하는 모습이 너무 애잔하다.
요즘 어머니께 전화 오면 가끔 그런 말을 하신다.
'참... 그때 네가 그거 사달라고 그렇게 졸랐었는데. 그게 뭐라고... 좀 사주고 그럴걸...'
그렇게 일평생을 해주시고도 못 해줬던 것이 자꾸 생각나신다는 것이다.
사랑...
어머니는 내게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도 넘칠 만큼의 사랑을 주셨다. 어렸을 때는 생각 없이 받기만 한 그 사랑이 당신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다 커서야 알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드리려고 나름 노력하지만, 아직 어머니께서 주신 사랑에는 발 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참 부끄럽기만 하다.
주고 또 주고도 부족하다는 당신의 사랑. 그리고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희생.
내게 있어 '어머니'라는 단어에는 항상 이런 애잔함이 묻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