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 아버지라는 존재는 일반적인 경상도 남자 이미지와는 다르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선 나와 동생을 이름보다는 별명으로 많이 부르셨고, 아직도 그렇게 부르신다. 워낙 친근하게 대해주셨고 자식사랑이 크셨어서 사춘기 반항이나 그런 것 없이 항상 편하게 지냈다.
IMF로 모두가 힘들어하던 그때, 아버지께선 하시던 가게를 그만두시고 갑자기 집을 나가셨다. 그리고 2주 정도 뒤에 다시 들어오셔서는 일자리를 구하셨다고 하셨다. 회사라기보다는 '체육회'라는 단체에 들어가신 것인데, 그곳에서 20년 동안 활동하시며 '사무국장'을 거쳐 '상임이사'까지 하셨다.
이런 단체에서의 직급은 '돈'보다는 '명예'에 이점이 있는지라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지만 덕분에 지역사회에서 나름 영향력은 있으셨다. 또 리더십이 있으신지라 나는 아버지의 그런 멋진 모습만 보고 자라왔다.
아버지께선 집에서 직장 얘기를 꺼내신 적이 없다.
힘들다는 얘기도 거의 꺼내신 적이 없다.
내게 있어 아버지의 모습은 자식들에게는 장난기 넘치고, 밖에서는 리더십 넘치는 모습이 전부였다. 적어도 직장을 그만두시기 전 까지는 그런 줄로 알았다. 하지만 본인 잘못은 아니지만, 책임을 져야 하는 지라 어쩔 수 없이 일을 그만 두실 수밖에 없으셨던 그때, 그 시기만큼은 참 힘들어하시던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다.
아버지께선 등산을 좋아하시는데, 퇴직하신 후에는 나도 아버지를 따라 근처 산으로 자주 등산을 갔다. 등산을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내가 봐왔던 아버지의 모습 이면의 상황을 이때 가장 많이 알 수 있었다. 아버지께선 일을 그만두신 지금이 인생의 황금기라고 하셨다.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고... 앞에서 보인 멋진 리더십 뒤에는 수 많은 사람들의 시기, 질투, 음모, 배신이 있었던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여기서 뀐 방귀가 저기서는 똥차 왔다고 소문이 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좁은 지역사회에서는 그런 경우가 많고, 그래서 처신에 더 조심해야 한다. 아버지가 다니신 직장이 특히나 그런 것들이 많았던 것이다. 나 또한 관리직이어서 사람에게 받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사람을 질리도록 만드는지 익히 알고 있다. 아버지께선 나보다 훨씬 가혹한 환경을 버텨내며 사셨던 것이다. 그리고 집에서는 내색 한 번 내지 않으셨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가슴과 어깨를 보고 자라왔다.
아버지의 가슴은 많은 사람을 안을 만큼 넓으셨고,
아버지의 어깨는 누구보다 든든했다.
하지만, 언제 부턴가... 나는 아버지의 가슴과 어깨보다,
당신의 등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번 보이기 시작한 아버지의 등은,
의식한 것도 아니건만 뵐 때마다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가 가끔씩 작아지는 듯이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나 직장을 그만두실 때 그게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위에서 짓눌러도 티낼 수도 없고 아래에서 치고 올라와도 피할 수 없네
무섭네 세상 도망가고 싶네 젠장 그래도 참고 있네
맨날 아무것도 모른 체 내 품에서 뒹굴거리는 새끼들의 장난 때문에 나는 산다
힘들어도 간다 얘들아 이빠 출근한다
- PSY '아버지' 중 -
'밥 먹었나? (응, 먹었지) 그래, 들어가래이~' (예~!)
집을 떠나 타지 생활을 한 뒤부터는 아버지께선 꼭 하루 한 번씩 전화를 주셨다. 그리고 대부분 딱 저 두 마디를 하시고 끊으셨는데, 덕분에 통화 시간은 10초 내/외인 경우가 많았다. 그때는 '아니... 저 두 마디 하고 끊을 실 거면 대체 전화를 왜 하시는 거지...' 하고 좀 궁금해했다. 그리고 그 전화는 내가 취업을 하고 난 후에도 변함없이 계속 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전화가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별것 아닌 두 마디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느껴질 때가 가끔 있었다. 그 감정을 처음 느꼈을 땐 '회사생활이 정말 힘들긴 힘든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힘든 상황에서 들은 아버지의 음성이 위로가 됐었던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두 마디의 진짜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밥 먹었나? (잘 지내지?)'
'들어가래이~ (사랑한데이~)'
아버지께서 한결 같이 내게 건넨 그 두 마디는,
다 커서 어른이 되어버린 자식을 향한 수줍은 애정표현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께선 한결 같이 내게 당신의 사랑을 표현해 주셨고, 그게 사랑이었음을 20대까지는 몰랐다. 사회생활 후 삶의 풍파를 조금 맛 본 후에야 비로소 그걸 알게 된 것이다. 역시 사람은 힘든 시기를 겪어 봐야 주변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나 보다 싶긴 하다.
아버지께선 당신이 기쁘던, 슬프던,
삶이 힘들던, 힘들지 않던,
잊지 않고 애정표현을 해 주셨다.
그게 결코 쉽지 않은 것임을, 그것이 사랑임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애정표현은 지금까지도 변치 않고 계속해 주신다. 그 두마디가 사랑이라고 알게 된 지금은, 내겐 어려운 삶을 이겨 낼 수 있는 큰 힘이 된다.
아버지께서는 오늘도 연락이 오시겠지??
밥 먹었나?(잘 지내지?)
들어가래이(사랑한데이~)
어린 시절. 아빠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