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요약 : 절대 짝사랑하지 마세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나는 사랑의 풍요함을 믿는 편이다. 사랑을 하면 할수록 그 감정은 소모되기보다는 오히려 풍부해질 것을 믿는다.
하지만 사랑이 풍부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과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관계성'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한 관계를 중요시할 때 사랑은 비로소 모자란 것을 채우는 것이 되고, 상처를 덮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풍요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돈독한 관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의미를 되뇔 필요가 있다.
베르테르는 누구보다 더 열정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이다. 그의 사랑은 불타오르는 불꽃처럼 뜨겁고, 행동력 있고, 힘이 넘치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게는 이토록 많은 것이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은 모든 것을 삼겨버린다. 나는 이토록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없으면 모든 것은 무(無)이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에서 - p.134
로테를 향한 마음이 단순히 보고 있을 때만 기분이 좋다는 호감을 넘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도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그녀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면 저렇게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그리워할 수 있는 것도 복이라는 생각도 들게 한다.
하지만 베르테르가 슬플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느끼는 내면적인 감정이 그리고 호감이 사랑이라는 모습이 자기만의 것이라는 점이다.
소설을 보다 보면 베르테르의 사랑은 결국 파괴를 가져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베르테르의 감정을 호의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존재적인 면을 지닌다.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사랑은 타인으로 인해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내면적인 연결이 된다. 따라서 사랑은 누군가를 가지려는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존재의 양식에 있어서 믿음은 우선 어떤 관념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내적 지향 즉 하나의 태도이다. 어떤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믿음 속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낫다.
-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중에서 - p.66
사랑을 소유 지향적 측면이 아니라 존재 지향적인 측면으로 바라본다면 사랑은 자연스럽게 존재의 속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자고로 존재의 속성은 '존재 유지'에 있다. 존재의 속성은 유지를 원하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파괴적인 속성을 지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베르테르가 비극적인 결말을 보인 것은 존재의 속성을 유지하지 못한 사랑을 했기 때문이다. 베르테르는 누구보다 로테를 원했고, 가지려 했고, 소유하려 했고, 자신의 드러내지 못하는 갈망 속에서 자신을 파멸시키는 결과를 맺은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인간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은 곧 자신을 초월하는 것이요. 사랑의 대상에게 자신의 애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새뮤얼 이녹 스텀프,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중에서-
사랑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자기 초월적인 것이다. 중세의 철학자도 이미 누군가를 가지려는 것을 사랑으로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열어주고 초월하는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사랑을 해석하는 것이다. 상대방과 나의 관계에서 존재론적으로 연결되는 사랑은 나도 모르던 모습을 알게 하고 잊힌 나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자기 초월이 맞다.
결국 짝사랑이 슬픈 이유는 이 사람이 내 마음을 모른다는 점에 있다.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서로를 믿는 일종의 태도라고 한다면 내 열정적인 마음을 알지 못하는 또는 알아주지 않는 사람에게 내 존재를 초월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그렇기에 확인하고 싶고 그 사람의 마음에 내가 있기를 확신하고 싶은 마음에 혼자만 소모하는 감정이 나타나게 된다.
평점 : ★★★ (그냥저냥한 수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