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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Jun 15. 2022

두려움, 분노, 혐오를 넘어서

마사 누스바움, 타인에 대한 연민 

혐오, 이성적 사고 대신 손쉬운 타자화 전략

1. 불안한 개인은 어떻게 타자를 베재하고 혐오로 발신하는가 

마사 누스바움...오랜만에 읽는다. 

논문을 준비할 적에 감정의 격동, 연민 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 꽤나 많은 통찰을 얻었다. 

이번 책도 그런 점에서 연민을 다루고 또한 많은 의미를 주고 있다. 


타인에 대한 연민이라는 이 책은 혐오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오늘날 사회게 날이 갈수록 혐오가 정당화 되고 있고 더욱 심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분명 발전되고 진보된다는 말은 시민의식을 더불어 도덕성까지 포함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도덕이라는게 기준이 주관적이다 보니 결국 각자가 각자의 신념대로 행동하는게 옳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 점에서 내 기준에 혐오라고 해도 상대방에게는 혐오가 아닐 수도 있다. 

이 문제는 특히나 여성, 성별 문제에 적용된다. 분명 푸코가 말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상식은 형성되어 왔다라는 말을 떠올릴 때 그 기준이 역사적으로 남성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결합되어 우리가 판단하는 상식적 기준이 남성적이고 그로 인하여 많은 차별과 흔히 말하는 여성혐오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한국도 현재 그렇지만 저자가 살고 있는 미국도 지금 상당하나보다. 

페미니즘에 부정적인 사람이 한 말이 기억난다. 페미니즘의 역사가 긴 미국도 여전히 갈등과 분열의 상황에 놓여있는데 여기서 페미니즘의 운동의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 말은 어쩌면 지금까지 한 것들이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하고 그저 사람들의 여론을 혼동하고 선동했다는 말과 같다. 


그런 점에서 마사 누스바움은 페미니즘 운동의 결과나 의의가 아니라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혐오가 형성되는 배경을 설명하고자 한다. 사회의 분열이 되는 모습은 페미니즘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수잔 팔루디의 말처럼 어쩌면 페미니즘의 대한 대항이라 볼 수 있겠다. 


이번 책에서 가장 특징적인 주장은 여성혐오와 차별을 구분한다는 점에 있다. 

사실 혐오와 차별은 같이 간다고 대부분 생각한다. 그것이 일방적인 통념인데 마사 누스바움은 이 둘을 구분하면서 혐오가 어떤 모습으로 작용되는 지를 분석한다. 


차별과 혐오는 분명 함께한다. 그러나 항상 동일하지는 않다. 마사 누스바움은 이걸 쉽게 설명하고자 노력한다. 쉽게 말해서 역사적으로 내려온 남성주의적 형태는 차별이 맞다. "남자의 아내는 집사람이다."가 차별이라면 "그러니 여성은 집에 있어야 한다."는 차별에 근거한 혐오다. 


마사 누스바움이 이 책에서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개인적인 해석으로는 차별에 근거한 행동을 혐오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혐오는 차별과 너무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무조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차별은 무의식적인 부분이 존재하지만 마사 누스바움이 말하는 혐오는 의식적이다. 의식적이라는 말은 곧 '인지'의 부분을 말한다. 차별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쉽게 일어난다. 흔히 문화적으로 제도적으로 긴가민가 할때가 많은데 그 이유가 차별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서 혐오는 인지된다. 우리가 무엇을 보기 이전에 그저 불안만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인식된 순간 혐오로 발전한다는 말이다. 재미있는 실험이 하나 있다. 마사 누스바움이 소개한 것이기 때문에 실험에 대한 신뢰도나 찬성여부는 각자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근데 아마 일반적으로 보면 잘 믿지 않을 거 같다는 느낌?


아무튼 그 실험은 같은 물질을 넣어두고 냄새를 맡게 했을 때 인간의 배변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역겨움과 동시에 혐오를 느끼지만 치즈라고 생각한 사람은 좋아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혐오를 결정하는 것은 그 물체에 대한 정의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 또는 인지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같은 물질에 대해서 의견이 상이한 탓은 그것을 바라보는 인지의 차이에 있다. 칸트의 말처럼 인지의 구조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혐오로 받아들이는 무엇이 있는 것이고 마사 누스바움이나 주디스 버틀러처럼 페미니즘 저자들은 이러한 무언가를 구조주의적 영향으로 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차별과 혐오는 구분된다. 오늘날 혐오가 상당한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인식과 판단하는 기준이 드러났다는 말일 것이다. 뭐 물론 페미니즘 자체가 부정적인 것을 보아서는 그 원인이 복합적이긴 하겠지만, 그 근본은 벨 훅스가 말한 것처럼 남성, 자본, 백인주의가 아닐가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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