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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May 14. 2019

휴먼 드라마지, 추리소설은 아닌 듯

히가시노 게이고, "인어가 잠든 집"

히가시노 게이고, 인어가 잠든 집 

개인적으로 핑크색으로 한건 아주 잘한 거 같다 


책 목차

1장 : 오늘 밤만은 잊고 싶어 

2장 : 숨 쉬게 해 줘 

3장 : 당신이 지키려는 세계는 

4장 : 책을 읽어 주러 오는 사람 

5장 : 이 가슴에 칼을 꽂으면 

6장 : 누가 그때를 정하는가 


1. 당했다, 히가시노 게이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은 정말로 많다. 그것도 추리소설 중에서는 베스트셀러에 항상 꼽힐 정도로 있다.


독서모임을 여러 곳을 갔을 때 항상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한번 정도는 항상 언급이 될 정도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소설을 처음 접할 때는 당연히 추리소설 일거라는 생각을 했다. 


책 마지막 추천사에 보면 책을 소개할 때 "충격과 감동의 드라마"라고 해놓았다. 그런데 하필 추리소설이라는 편견이 자리 잡아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충격과 반전"으로 보았다. 사람이라는 게 신기하게 책을 보다가 언제 반전이 나오나, 언제 추리를 하는 사건이 터지나를 중점으로 봤다. 살인사건은 안 나와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당했다. 당연히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다. 그런 사건은 나오지 않으니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을 기대했던 사람이라면 다소 아쉬울 수도 있겠다. 


책 자체의 구성과 진행은 아주 좋다. 확실히 유명한 소설가라는 이름이 헛되지 않다는 점을 알려준다. 불필요한 내용 설명이라던가, 분량 늘리기를 위한 반복 설명 같은 것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느낌을 유지한다. 그것이 아마 가장 특색 있는 장점이 될 것이다. 


책은 휴먼 드라마에 가깝다. 확실히 게이고가 주고자 했던 감동은 분명히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책 소개에서도 나왔던 것처럼 충격과 감동이라는 점에서 '충격'의 요소는 극히 적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추리소설의 대가이기 때문에 일부러 넣은 말이 아닐까 조금 의심해본다. 


분명 히가시노 게이고가 추리소설만 쓰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분명 입문자에 한해서는 추리소설 작가로만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겨냥한 게 아닐까 싶다. 사실상 이번 책은 추리소설은 아닌 게 맞다. 


2. 나름대로 이 책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분석을 해보자면

초반부에는 큰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생각하는 방향과 선택의 순간에 있어서 다른 지점을 잘 그려낸다.

거기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양자택일의 순간에 어떤 것도 옳고 그른 것이 없다는 점이다. 밀란 쿤데라의 이야기처럼 "인생은 단 한번뿐이라 선택의 순간에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인생은 깃털처럼 가볍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야말로 가오루코와 가즈마사가 선택하는 미즈호에 대한 판단은 깃털처럼 가볍다. 그와 동일하게 유키노를 위한 심장이식의 선택 역시 너무나도 가볍다.

거기서 느끼는 진실에 대한 가벼움은 우리가 진실이라는 의미로서의 무거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진실이라는 이름에 얼마나 많은 선택의 기준을 담아왔는가를 깨닫게 한다.

책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관찰자에 따라 미즈호의 상태는 생과 사를 넘나 든다는 점에 있다. 최소한 가오루코에게 있어서 미즈호는 살아있다. 단지 잠들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즈호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은 생기가 있다.

하지만 미즈호를 뇌사상태로 인정하고 사망으로 간주한다면 가오루코는 그야말로 시체와 함께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마치 좀비처럼, 마치 네크로필리아처럼 살아날 수 없는, 예전으로 돌아올 수 없는 미즈호를 향한 가오루코의 사랑은 하나의 정신질환처럼 보인다.

가오루코의 입장에서 보면 미즈호는 여전히 살아있으니 죽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유키노 부모 입장에서 보면 더 이상 가망이 없는 사람보다는 가망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더 좋다. 물론 이 두 가지 입장이 모두 맞고 모두 틀리다.

울리히 벡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신"을 섬긴다. 자기만의 신이란 세상의 세속화로 인하여 모든 가치가 상대주의적으로 변하자 각자 나름의 판단을 하기 위하여 자기만의 신을 만들어 가치판단을 한다는 것이다.

가오루코에게 있어서 자기만의 신은 '미즈호' 그 자체였다. 이전으로 돌아가서 다시금 활동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그녀를 이끄게 하는 힘 그 자체였다. 그런 자기만의 신을 죽었다고, 더 이상 없다고 하는 것이 그녀에게 있어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명제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자기만의 신은 '자아 종교'다.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은 스스로를 붕괴시킨다. 소설의 맥락에서 본다면 가오루코가 가장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미즈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미즈호가 살아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활동할 때 그녀 스스로가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물론 마지막에 가면 그런 자기만의 신이, 미즈호의 육체적이고 시공간에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죽음을 인정하게 된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미즈호의 상태를 사람들이 규정하고 평가할 때 정작 미즈호는 아무런 말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뇌사 상태에 빠져서 의식이 없다는 것이 의식불능을 의미하지만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자아는 타자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자크 라캉은 주체성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해서 규정된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미즈호 자체가 살아있음과 죽어있음의 맥락에서 스스로가 판단하는 것이 아닌 주변에 의해 판단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라캉은 "기표는 기의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진다"라고 말한다. 진리에 다가갈수록 그 진리는 왜곡되어서 멀어진다는 의미다. 미즈호라는 사람의 진리에 다가갈수록 사람들은 더 알 수 없어진다. 미즈호는 살아 있는가, 죽어있는가? 다가갈 수 없다. 알 수 없다. 그리고 미즈호는 말이 없다.

따라서 인어가 잠든 집이라는 말은 걸을 수 없던 인어가 자신의 생명으로 인해 누군가 다시 살아갈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평점 : ★★★ (양은 많지만 쉽게 읽을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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