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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Feb 13. 2020

시간은 알지만 결국 모른다  

선한용, "시간과 영원" 

선한용, 시간과 영원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을 읽었으나 추가 개념이 더 필요한 것 같아서 이 책을 읽어 보았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꽤 읽기 편해서 추천하기에 적당한 난이도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전통적인 신학을 파악하기에 매우 중요한 지점을 가지고 있다.


어거스틴의 '시간'에 대한 질문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우리는 시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답을 할 수 없다" 


이 말이 어거스틴이 물어본 질문이다.


그 내용을 분석하자면 우리가 시간에 대해 알고 있다는 지점은 물리적인 시간개념이다. 한시간, 두시간, 한달, 일년과 같은 개념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구분할 수 있게 한다.


흔히 이것을 직선적인 시간이라고 한다. 더욱 보편적으로 해석하자면 직선적인 역사관이라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시간은 언제나 신의 창조 아래에 있는 것이다. 


신은 영원성을 가지고 있다. 즉 무시간성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가 된다. 

물리적인 시간 이외 마음의 시간이 존재한다. 그것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는 기억으로 현재는 현재로 미래는 기대로 나뉜다. 따라서 기대한다는 것은 그 안에 미래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기억과 기대 속에서 중요하게 자리잡는 것은 바로 '현재'이다. 현재를 감각하는 인간은 수직적인 시간 속에서 영혼의 팽창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시간의 개념은 바로 영혼의 팽창에 있어서 연관을 가지게 된다.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점은 바로 시간과 사랑의 개념이다. 직선적인 시간관은 순서를 의미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사랑에도 질서를 가져야 하는 순서가 있게된다. 


사랑의 무질서함은 고통을 낳게 된다. 뭐 의심과 질투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랑의 질서를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무제한적인 사랑을 무제한적인 대상에게 돌려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지점에 있어서 신을 의미하기에 무교인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을 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사랑의 질서가 있다는 건 의미가 있다.


상대방을 향한 자신의 기대감은 무제한적이다. 제한이 없기에 그 기대심을 상대방이 보답하기에는 인간의 한계가 절실히 드러나 실망을 하기 마련이다. 이 점이 무질서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나 최소한 자기자신을 먼저 사랑하거나 자신의 기대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린다 한다면 종교가 없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사랑의 질서를 회복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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