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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May 30. 2019

남편의 허세


결혼, 허세





    남편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드론을 하나 사줄까 싶었지만, 그건 사줘도 이 가격에 이런 걸 샀냐는 소리를 들을 게 분명해서 제꼈다. 소고기를 먹으러 가잘까 싶었지만 너무 평범한 데이트가 될 것 같아 그것도 제꼈다. 뭘 해주면 행복해할까, 고민하다가 놀이공원에 가면 좋겠다 싶었다. 에버랜드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는 남편의 가여운 말이 적절한 때에 떠올랐다는 사실에 기뻤다.


    곧 인터넷으로 싸구려 토끼 머리띠 두 개를 샀다. 에버랜드에서 파는 머리띠는 한 번 쓰고 버리기에는 너무 비쌌지만, 둘이 꼭 한번 써보고 싶은 마음에 생각해낸 요량이었다. 그리고 어떤 카드가 할인이 되는지 알아보았고, 에버랜드까지 차로 얼마나 걸리는지도 알아보았다. 만반의 준비를 남편 몰래 찌르르한 마음으로 해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주문한 토끼 머리띠 택배가 도착한 날. 나는 남편에게 에버랜드에 가자고 말했다! 남편은 진짜? 정말? 을 연발했고, 기뻐하며 행복해했다. 게다가 알아서 척척 도시락과 간식을 준비고, 갈 때 입을 옷도 미리 골랐다.






    그리고 D-Day. 우리는 몇 번 길을 잘못 들어 예상보다 늦게 도착했지만, 결국 에버랜드에 도착했다. 우리는 반값에 티켓을 사서 웅장하고, 화려하고, 로맨틱하고, 사랑스러우며, 심지어 아기자기하기까지 한 마법의 문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미 몇 번 와 본 적이 있어서 신기할 게 없었지만, 남편은 에버랜드가 이렇게나 넓은 곳이었냐며 환호에 가까운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구, 그렇게 좋아? 나는 괜히 남편을 아이에게 하듯 대하며, 등을 토닥이며 귀여워했다. 남편은 그 토닥임이 신경 쓰였는지, 유난히 대찬 소리로 티-익스프레스를 타러 가자했다. 여기 오면 그거 타야 한대. 그게 제일 무섭대. 나 놀이기구 잘 타서, 뭐 시원찮을 테지만.


    하지만 우리는 먼저 눈 앞에 있는 것들부터 하나하나 타보기로 했다. 제일 먼저 탄 것은 바이킹이었다. 저걸 몇 번이고 타봤지만 탈 때마다 배꼽 밑이 간질간질하고, 엉덩이가 붕 뜰 때마다 심장이 쫄깃쫄깃 해져서 나에게 바이킹은 꽤 무서운 놀이기구였다. 하지만 그날은 오직 남편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한 날이었기에. 나는 그래! 저거 타자!, 했다.


    쌀쌀한 날 탓인지, 월요일이었던 탓인지. 바이킹을 타려고 선 줄은 빠르게 줄었다. 우리는 긴장된 마음을 안고 바이킹 끝 쪽에 자리를 잡았다. 무섭겠다고 호들갑을 떠는 나를 바라보며 남편은 이 뭐가 그리 무섭냐고, 팔짱을 끼라 했다. 팔이 딴딴했는데, 분명 멋있어 보이려고 힘을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남편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러고선 어린애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막상 타보니 괜찮았다. 나는 팔짱을 풀고 두 손을 머리 위까지 뻗으며 소리를 질렀다. 크게 웃고, 즐거워했다. 높은 데로 올라가면, 더 높이 올라가고 싶어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짧은 운행 시간에 아쉬워하며 우리는 출구로 나왔다. 나는 즐거워할 남편을 기대하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런데, 어? 얼굴이 하얗다. 입술이 파랗다. 질린 얼굴이다. 나는 괜찮아? 토할 것 같아?, 했지만 남편은 괜찮다고, 저거 시시하다고는 하는데 얼굴은 그게 아니다. 누가 봐도 멀미를 심하게 한 얼굴이다. 남편은 급히 화장실을 찾았고, 나는 그 앞에서 꽤 오랫동안 남편을 기다려야 했다.






    화장실을 나오는 남편의 모습은 어딘가, 조금 부자연스럽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의 입 언저리에는 물이 묻어 있었다. 여보, 괜찮아? 걱정 어린 내 말에 남편은, 당연하지. 갑자기 배가 아파서 갔다 온 거야, 했다.


    나는 그런 남편의 허세가 꽤 귀여워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지만, 꾹 참고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리고 강풍으로 티-익스프레스 운행이 어렵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는 크게 아쉬워했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티-익스프레스 말고도 무서운 놀이기구는 많았다. 우리는 일곱 갠가를 더 탔는데, 남편은 무서운 걸 타고 나올 때면 퍼런 입술을 오물오물거리며 저거 시시하다는 말을 했다. 예를 들어 높은 데에서 뚝 떨어지는, 물을 많이 튀기던 놀이기구를 타고나서 그는 퍼런 입술로 차분하게 이렇게 말했다. 에잇, 별 것도 아닌 게 물은 엄청 튀기네. 그러고선 젖은 머리카락을 멋지게 흔들어 털며 나보고 괜찮아? 춥지? 하며 자기의 옷을 벗어 입혀 주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럽던지. 나는 물이 튀어 찝찝한대도 꾹 참고, 남편이 벗어 준 옷을 입고 고마워했다.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나니 늦은 밤이 되어 있었다. 우리 이제 돌아가자.


    우리는 정문으로 나와 셔틀버스를 타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 모습이 꽤 꼬질꼬질해 보였을 거다. 우리는 차에 타자마자 둘이 동시에 의자를 뒤로 훽 젖혔다. 그도 나도 속이 느글느글하고, 멀미를 하는 것 같이 괴로웠다. 나는 그렇게 의자에 누운 채로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좋았지? 근데, 나는 에버랜드보다 공지천 잔디밭에 돗자리 깔고 누워서 노트북으로 영화 보는 게 더 좋아. 추로스보다 편의점에서 사 먹는 봉지과자가 더 좋고. 멀미 나서 죽는 줄 알았어.


    그래? 난 좋았는데. 티-익스프레스 못 타서 아쉽긴 한데, 그래도 뭐. 아이고, 여보 때문에 놀이공원 이제 못 가겠다. 우리 이제 여기 오지 말고, 쉬는 날이면 산이나 공원으로 소풍이나 가자.


    남편은 의자에 누운 채로 풀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편의 허세가 더욱 귀여워 보여, 하마터면 그에게로 가서 쪽 소리 나게 뽀뽀를 할 뻔했다.











매거진_소박한 결혼산문

2018.05.05.~

@john.and.molly

Photo. ⓒKarolien Brughmans,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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