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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Aug 12. 2019

복숭아를 깎다가


결혼, 연합

 






   복숭아를 깎다가 손가락을 벴다. 왼손 엄지가 알싸하고 욱신대더니 이내 손가락에 묻은 복숭아 물을 따라 빨간 피가 퍼다. 얼른 후시딘을 바르고 밴드를 붙였다. 하지만 손에 물이 자주 닿으면서 습기가 찼고 손가락이 불었다. 찝찝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해서 밴드를 금방 떼 버렸다. 퉁퉁 불은 상처가 그새 붙었을 리 없지만 대수롭지 않게 손을 썼다.


    대수롭지 않게 손을 썼다는 말에는 수박을 썰고, 스마트폰을 만지고, 강아지를 들어 안고, 화장실에서 몇 번 손을 씻었다는 것 함께 신나게 손뼉을 친 것도 포함된다. 오랜만에 엄마 집에 들러 신나게 치킨을 뜯은 터였다. 나는 하루가 끝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칼로리를 털어내고 싶 급한 마음에 동영상을 보며 운동을 했는데, 손뼉 치는 동작이 자주 있었다. 나는 칼에 베인 손가락 생각은 않고 신나게 손뼉을 따라 쳤다. 한참 운동을 하다가 손가락이 욱신하길래 보니 아니나 다를까, 다시 피가 나고 있었다. 낮 보다 더 많이.


    손을 닦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상처가 제법 벌어져 있었다. 아이씨, 아파. 나는 다시 후시딘을 바르고 대충 후후 불었다. 물론 후시딘은 샤워를 하며 다 씻겨 내렸고 손가락이 아팠지만, 이번에도 호들갑을 떨거나 큰 마음은 쓰지 않았다. 아픔을 즐기거나, 내 몸이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 상처가 거슬려도 결국 다시 붙을 걸, 깨끗하게 아물어서 아무렇지 않게 될 걸 알았다.






    그게 꼭 부부 같았다. 작은 일로 토라진 사이가 오래가지 않고 다시 다정해 지리라는, 설령 다툼이 생각보다 길어지더라도 반드시 관계는 회복되리라는 믿음. 칼에 베어 벌어진 손가락이 곧 아물 것이라는 믿음은 잠시 서운했던 부부가 곧 서글서글해질 것이라는 믿음과 닮아 있었다.


    게다가 조그마한 상처가 주는 거슬림마저도 부부와  데가 있다. 지난밤 서로의 서운한 마음을 풀지 못하고 잠이 들면, 다음 날 하루 종일 마음이 찝찝하고 편하지 않다. 평소처럼 생활하다가도 돌연히 욱신대는 베인 손가락 같이, 여러 가지 일들에 밀려 가라앉았던 찝찝한 마음은 어느 순간 수면 위로 떠올라 있다.


    또, 상처가 아무리 작아도 그게 눈이나 혀나 연한 살 위에 난 것이라면,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도. 씁쓸하지만 부부로 사는 삶과 닮았다. 은 시간이지만, 같이 살면서 어떤 말이 남편을 살리고 또 어떤 말이 남편을 죽이는 지를 알아챘다. 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말에, 어떤 행동에 타격을 입는지도 부부로 살아가면서 더 많이 배우고 있다. 손가락에 난 상처는 괜찮다. 마음에 칼이 닿지 않아서 다행이다.






    어느새 손가락 위에 딱지가 앉고, 손을 쓰는 데 불편함이 없어졌다. 잘 먹은 밥 한 끼가 베인 손가락을 아물게 했다. 푹, 잘 잔 잠도 새 살이 되었을 거다. 그렇게 내 손가락은 그토록 당연한 것들의 당연한 유기로 나았다.


    나는 그 유기적 힘을 믿고 있었던 거다. 회복의 힘을, 원상으로 돌려놓고야 마는, 매우 찬찬하고 세밀하여 자세히 보아야만 보이는 힘을. 하지만 그 힘을, 그 당연함을 가벼이 여기진 말아야지, 생각했다. 잘 아물 손가락에 감사하며 부드럽고 말캉한 복숭아를 깎을 땐 더욱 조심해야겠다 생각했다.











매거진_소박한 결혼산문

2018.05.05.~

@john.and.mo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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