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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Nov 24. 2020

그 애 졸업식

    2월의 어느 추운 날. 녹았다가 다시 얼은 길가의 검은 눈과 흐린 하늘, 뺨을 스치는 매서운 바람과 영하의 온도에도 나는 얇은 코트를 입고 6cm 굽의 검은 에나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세상은 온통 회색인데 학교 앞에 펼쳐진 매대만은 시들지 않을 비누꽃들의 쨍한 색깔로 어지러웠다. 수많은 학생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내는 행복한 소음을 한 발짝 떨어져서 듣다가 나도 그 소리 섞여버렸다.


    졸업식은 학교 강당에서 진행됐다. 오랜만에 맡는 학교 강당 냄새, 마이크 소리가 왕왕 울리는 가건물의 높은 천장, 자주색 암막 커튼. 너무 밝은 핀 조명 때문에 안 그래도 컴컴한 강당 내부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빼곡히 앉아있는 학생들 품에 안긴 꽃다발만은 내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내 것도 얼른 전해줘야 할 텐데...'


    걔가 3반이랬던가, 4반이랬던가. 나는 한참을 헤맸다. 행사가 끝날 때까지 그 애를 찾지 못했고, 결국 그 애가 나를 먼저 발견했다. 아이의 품에는 다행히도 내 것 말고 다른 꽃다발이 안겨 있었다.


    "나 말고 누가 또 오셨나 보네!"

    "아, 네. 친구요."

    "아, 친구?"

    "네. 저는 선생님이 진짜 오실 줄 몰랐어요."


    졸업식에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나라도 꼭 와줬으면 좋겠다던 그 애 말이 귓가에 오래도록 맴돌았었다.


    "아, 그랬구나."

    "어쩌죠? 저 친구랑 같이 점심 먹기로 했는데..."

    "어쩌긴! 얼른 가서 친구랑  먹고. 졸업 축하해."

    "네, 안녕히 가세요."


    '이 추운 날 코트에 구두를 신고 비싼 꽃다발 사서 네 졸업식에까지 찾아와 줬는데 어쩜 고맙단 말 한마디를 안 하니.' 괘씸한 마음이 들어 돌아가는 길에 속이 불편했다. 나는 그 애에게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여기까지 찾아와 줘서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정말 와주셨군요!, 하는 호들갑? 아니면 그 이상의 감동을 느끼길 바랐던 걸까?


    내가 그걸 기대하는 건 옳은 일이었을까.





-

    성경에 보면 누군가 나에게 오 리를 같이 가자고 하면 군말 없이 십 리도 가주어야 하고,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까지 내어 주어야 하며,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까지도 돌려대 주어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그 구절들을 읽을 때면 나는 늘 감탄을, 그다음엔 막연함을, 그다음엔 좌절을 차례로 느꼈다. 과연 내가 렇게 살 수 있는 걸까. 그래, 오 리를 더 가주는 거나 겉옷까지 내어주는 건 그렇다 치는데, 왼편 뺨까지 돌려 대는 건 좀 그렇지 않나.


    그 구절 뒤에는 또 이런 구절이 이어진다. 구제할 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착한 일을 남모르게 하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착함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은근한 마음까지도 버리라는 뜻이기도 하겠다. 도대체 왜 신은 나에게 이토록 높은 경지의 선을 요구하시는 걸까!


    이런 불경한 마음을 품다가도 결국 예수님 흉내라도 내보려는 이런저런 시도들을 했다. 대부분은 나의 착함이 만방에 알려지기를 바라거나 혹은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기를 바라는 욕심 때문에 실패했다. 왜 나는 착한 일을 착한 일로만 두지 않가.


    나의 착한 일의 근원이 사랑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 애 졸업식 후였다. 온전히 사랑에만 착한 일의 근원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 애의 따듯한 환대를 기대했던 거다. 나의 착함이 적어도 그 애에게만은 인정받았어야 되는 것이었다.





-

    얼마가 지나고 곧 아이를 낳는다는 그 애의 연락을 받았다. 만삭의 몸을 가진 아이 생각을 하니 마음 한편이 이상했다.


    "그래, 몸 잘 챙겨야 해. 혹시 뭐 필요한 건 없고?"

    "네..."

    "먹고 싶은 것도 없어?"

    "네... 선생님, 그런데요. 제 졸업식 때 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응?"

    "그때 말씀 못 드린 것 같아서요. 죄송해요, 선생님."





-

    ... 추웠던 2월의 어느 날, 졸업식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었던 괘씸한 마음이 생각이 나서 많이 부끄러웠다. 어쩌면 신은 나에게 아주 높은 경지의 선을 요구하시는 게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그저 조금만 더 사랑하기를, 아주 작은 것이라도 상관없으니 진짜 사랑을 살기를 바라셨던 것이겠다.


    아,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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