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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Dec 03. 2020

아무도 조롱받지 않도록

    어렸을 때 보던 개그 프로그램을 유튜브에서 다시 볼 때가 있다. 일부러 찾아본 것은 아니고 어쩌다 보니(알고리즘의 인도로) 십 년 전, 십오 년 전 영상들에까지 손가락이 닿게 된 것이다. 그런 오래된 프로그램을 다시 보면 마음이 이상해진다. 관객을 웃기며 무대를 뛰어다니던 사람들이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싶은 마음에 괜한 걱정도 되고, 와 내가 저걸 보면서 자랐구나 싶은 마음에 새삼 놀랍기도 하다.


    그런 영상들 대부분은 지금 봐도 웃기고 재미있지만, 어떤 영상들은 어딘가 보기에 불편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개그가 불편해졌다. 다른 사람의 신체적 특징을 놀림감 삼거나 아무렇지 않게 상대를 툭툭 때리는 연출이 그렇다. 개그 프로그램이야 사전에 미리 상의하고 대본을 짜둔 거니까 연기자끼리 상처를 주거나 받는 일은 드물었겠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아슬아슬하다. 꼭 저렇게 웃겼어야 했나, 덜 자극적인 웃음은 없었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생각해보면 그런 프로그램들 보다 더 아슬아슬한 건 평범한 사람들의 모임다. 대학생들이 모여 공동체 게임을 하는 자리에서 진행자가 장애 때문에 키가 작은 한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잇, 여긴 형님들 모여서 겨루는 자리야. 넌 초등학생이니까 패스." 이 얘길 들은 청년은 너무 부끄러워 당장 강당을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고 했다. 진행자의 말에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거나 아니면 대부분 무관심했기에. 그 상황에서 강당을 박차고 나가면 결국 자기 모습만 초라해질게 뻔기 때문에, 그는 그저 조용히 빗겨 설 수밖에 없었다 했다. 그 후로 청년은 다시는 그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 청년의 말을 듣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다음엔 많이 부끄러웠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주도적인 한 사람이 만만한 사람을 희생시킴으로 분위기를 띄우는 장면은 분명 부끄럽고 유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 역시 이를 묵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부터 누군가 타인을 조롱거리 삼아 놀리며 웃음을 만들려고 할 때 반응하지 않고 화제를 돌려버리 애를 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조롱에 대한 반응 자존감의 문제라고 말하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자존감 높아서 조롱의 어투를 툴툴 털어버릴 수 있는 것이고, 자존감이 낮아서 꽁하게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도대체 우린 얼마나 더 강해야 하는가. 도대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이건 자존감의 문제가 아니다. 조롱받는 사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건 조롱하는 사람의 인격 문제다.


    의도적이었든 습관적이었든 아니면 정말 우리 자신도 모르게 타인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아 잠시라도 즐거웠다면, 우린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런 일에 직접 나서지 않고 곁에서 보기만 했다 해도, 우린 부끄러워해야 한다. 이 세상 누구도 조롱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 누구도 그것에 동조해서는 안 된다. 묵인과 방관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서도 안 된다. 평론가 신형철의 말처럼, '이 세상에 해도 되는 조롱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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