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미림 Dec 24. 2020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말라카

    여행을 하면서도 여행이 그리울 때가 있다.


    이제 막 도착한 낯선 여행지에서 나는 마치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유령이 된 듯한 기분을 만끽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미국 여행기>에 적어둔 것처럼 낯선 땅 위에는 나의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았고, 때문에 나는 오롯이 현재를 누리며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낯선 땅 위에도 나의 하루들은 쌓여갔고, 어쩔 수 없는 익숙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유령처럼 투명했던 나의 몸이 조금씩 선명해지고 결국엔 보통의 사람이 되어가는 일은 분명 여행 묘미이기도 하지만, 그런 일들이 너무 잦아질 땐 어김없이 여행이 그리워지곤 했다.


    일여 년의 라오스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 나는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에 들렸다.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고급 아파트의 작은 방 하나에서 지냈다. 그때만 해도 한국 사람들이 쿠알라룸푸르의 고급 아파트를 투자 목적으로 구입해 두고, 거기에 한국인 여행객을 손님으로 받아 숙박업을 하는 일이 흔했다. 아파트 주변엔 잘 정돈된 정원이 있어 매일 아침 산책을 나갔다. 여전히 덥기만 한 12월, 정원 가운데 있는 분수는 아이들의 좋은 수영장이 되어주었다. 나는 아이들 노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다 말고 바지를 걷고 물에 발을 담갔다. 그러면 온몸의 열이 식는 것만 같았다. 거기서 책을 읽다가 배가 고플 때쯤 도심으로 나갔다. 백화점도 둘러보고, 지하철역에서 로티보이 번도 사 먹고, 커다란 빌딩 앞을 지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 요구르트를 먹으며 TV를 봤는데, 한국인 호스트 덕에 우리나라 프로그램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그건 정말 편안한 시간이었으나 더 이상 여행 같지는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간단한 짐만 챙겨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거기서 말레이시아의 항구 도시인 말라카로 가는 버스를 탔다. 급하게 결정한 여행이라 버스를 타고 가는 세 시간 동안 얼마나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또 들떴는지 모른다. 말라카에 가기로 한 건 지난밤 인터넷으로 본 핑크색 광장 때문이었지만 그 외에는 말라카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말라카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할 일은 그날 묵을 숙소를 찾는 일이었다. 거기엔 여러 개의 게스트하우스가 있었는데 낯을 가리는 나는 돈을 더 내서라도 1인실을 이용하고 싶었고, 그래서 숙소를 찾는 데 애를 먹었다. 다행히 길에서 만난 일본인 여행자 호리의 도움으로 좋은 방을 얻게 되었는데 그 일로 호리와 나는 말라카를 함께 다녔다. 호리는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았고, 나보다 열 배 정도 많은 도시를 여행해 본 것 같았지만... 꽤 순수했다. 그는 동그란 얼굴과 진중한 어투를 가지고 있었고, 어떻게든 나를 웃겨 보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정말 온통 분홍색인 광장을 걸었다. 그러다 괜찮은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고, 자전거 택시를 타고 야경을 보았다. 그때까지도 나는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란 걸 알지 못했다.


    "정말 크리스마스이브란 걸 몰랐다고?"

    "응, 정말 몰랐어."

    "봐봐. 여기저기 크리스마스 장식이고, 사람들도 들떠 있어."

    "그러게. 넌 내일 뭐 할 거야?"

    "난 내일 다시 쿠알라룸푸르로 떠나."


    나는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마 호리에게 내일 아침 교회에 가서 성탄 예배를 드리자고 했다면 거절당할 게 뻔했으니까.


    다음 날 아침, 다행히 일찍 눈이 떠졌다. 어제 말라카를 다니면서 작은 성당이 있는 걸 봐 두었다. 분명 그곳에 성탄 미사가 있을 텐데, 정확한 시간을 모르니 무작정 거기로 향했다. 내가 도착했을 땐 이미 강론이 한참이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미사였지만 나는 전심으로 예수님께 감사드렸다. 미사가 끝나고 현지 교인들의 축복을 받은 다음 성당 바깥으로 나갔다. 쏟아지는 햇빛, 새파란 하늘, 후끈한 공기. 여긴 여전히 한여름이었다. 교회 앞 광장엔 히잡을 쓴 무슬림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며 까르르 웃고 있었다.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무슬림 아이들이 부르는 캐럴, 말레이시아어와 중국어. 호리가 사라진 말라카에서 나는 또다시 유령이 되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고, 설렜다.


    거기서 하루를 더 묵고 쿠알라룸푸르로 돌아왔다. 터미널에 도착해서 보니 많은 사람들이 노란색 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오늘이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축구 홈경기가 있는 날이랬다. 나는 흥분한 사람들 사이를 조심조심 걸어 다니다가 결국 한 무리의 청년들에게 붙들렸고,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춰야 했다. 그날 어느 팀이 이겼는지는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말라카에서 유령이 되어 돌아온 줄만 알았던 내가 너무 쉽게 그들의 눈에 띄었다는 게 조금 억울했다는 기억밖엔 남아 있는 게 없다.


2010, 말라카, 말레이시아
























이전 19화 나를 꺾어 버리는 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