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부터 오늘까지, 윗집은 쉬지 않고 소음을 내고 있다. 내가 알기론 윗집엔 중년 부부만 살고 있다는데, 아마 연말이라고 친구들을 부르는 모양이다. 쿵쿵쿵, 뛰어다니거나 큰 소리로 욕을 하거나 그도 아니면 여럿이서 트로트를 부른다. 며칠 전엔 그 소리가 너무 심해서 참다가, 참다가, 참다가 안 되겠다 올라가 봐야겠다 할 때 소음이 끝이 났다. 그때가 새벽 한 시였다. 새벽 한 시, 밤낮이 바뀐 나에겐 아직 한창의 시간.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어르신들이 많아서 그런지 이른 아침부터 온 동네가 분주하다. 나는 그 분주하고 부산한 아침 시간보다는 늘 늦은 밤이 좋았다. 요즘 같은 겨울철엔 낮이 짧아서 아쉬운 마음이 들긴 해도... 모두가 잠든 늦은 밤과 새벽 시간의 고요를 포기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새까만 밤에 노란빛의 스탠드 두어 개를 켜 두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 조용한 중의 기도, 약간의 일을 하는 시간들. 가끔은 오랫동안 게임을 하고 또 가끔은 야식을 먹는 일이 좋았다. 듣는 힘이 약해서 조금만 소란스러워도 쉽게 지치는 바람에 고요한밤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지리산 노고단에 오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두 가지 일로 충격을 받았었는데, 그중 하나는 자동차 소음이나 사람 말소리는 물론이고 새소리나 바람소리마저 들리지 않던, 마치 진공의 상태 안으로 들어가 있는 것처럼만 느껴지던 무음의 시간의 경험이다. 그때가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의 어느 평일이었는데, 노고단을 오르는 사람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수가 아주 적었었다. 그러다 나는 아무도 없는 나무 데크에 누웠고 마침 그때가 딱 무음의 시간이었다. 일 분, 이 분이 느리게 흐르는, 공기마저 멈춰버린 것 같은 시간.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노고단에서 받은 두 번째 충격은 지리산에서 일하는 산림청 직원과의 대화였다. 어느 정도 산을 오르니 초소 같은 앙증맞은 건물 안에 산을 관리하는 직원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지리산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어 그에게 말을 걸었고, 그러다 보니 쓸 데 없는 것까지 묻게 되었는데 이런 것들이었다. '안 심심하세요?', '집은 어떻게 가세요?', '뭐 하면서 보내세요?' 그는 나의 철부지 같은 질문에 철부지 같은 표정으로 답했다. '아, 심심하죠.', '집엔 안 가요. 6개월에 한 번씩 교대 근무를 서요.', '산도 보고, 사람도 보고, 책도 보면서 보내지요.' 난 그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그의 말은 아까 내가 누리던 무음의 시간을 언제든 누릴 수 있다는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물론 그의 일은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을 테지만...
인생엔 왜 이렇게 많은 소리들이 있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사실 늦은 밤의 시간에도 늘 소음이 있어오긴 했다. 냉장고가 내는 우우웅-하는 소리나 노트북에 열이 찰 때마다 돌아가는 팬 소리 같은 것들. 차가 달리는 소리와 강아지의 발톱 소리. 아니 그런 것들 말고도 소문과 소문들,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 무책임한 걱정들, 번잡한 마음의 한숨 소리까지. 모든 소음을 제쳐두고 잠으로 도망갈까 하다가도, 잠은 늘 꿈을 불러들이니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도나에겐 소음의 연장일 뿐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결국 천국은 완전히 혼자이거나 온전히 하나인 곳, 그래서 서로의 소리가 무음처럼 다가오는 곳이지 않을까. 나에게 천국은 모든 소리가 없는 무음의 나라다. 천상의 음악이 쉬지 않고 연주되는 데가 천국이라면, 거기가 확실히 천국이라 하더라도 너무 피곤할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어이가 없긴 해도... 노고단에서 나는 천국을 살짝 엿보았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