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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Dec 29. 2020

나를 꺾어 버리는 일

셀축

    아다르는 내 옆에 꼭 붙어 앉아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다음다음 역에서 자기는 내려야 하지만, 자기가 내린 후 다섯 정거장만 더 가서 내리면 거기가 셀축 역이니까 내리는데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면서. 아다르는 자기의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까지 꼼꼼히 적어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그녀가 아니었다면 아마 오늘 안에 셀축에 도착하기는커녕 아무 역에 내려 노숙을 해야 했거나 셀축이 아닌 다른 도시로 여행 일정을 바꿔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아다르가 내리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셀축에 도착하니 밤 열한 시가 넘었다. 수많은 까마귀들이 하늘을 어지럽게 날고 있었고, 곳곳에서 시끌벅적한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들을 잰걸음으로 스쳐 지나가며 호텔로 들어갔다. 무거운 배낭을 내리자마자 침대에 누웠고, 그대로 잠들었다.


    아침의 셀축은 소란스럽던 밤과 달리 아주 평화로웠다. 그리 이른 시간도 아니었는데, 온 동네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호텔을 나와 걸었다. 들리는 건 새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소리뿐이고, 살아있는 건 나와 고양이와 새들 밖에 없는 것 같은 시간. 벤치에 앉아 볕을 쐬는데 옆에 노란색 고양이 한 마리가 옆에 앉았다. 그 애는 나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아 내가 보는 것을 같이 바라보았다.


    다시 호텔로 돌아가 아침 식사를 했다. 직원과 요리사가 번갈아가며 내게 잘 잤느냐고 묻는다.


    "네, 어젠 너무 피곤해서 제대로 인사를 못했어요, 미안해요."

    "미안하긴요. 그래서, 오늘은 뭘 할 거예요?"

    "글쎄요. 사실 아무것도 생각해 둔 게 없어요. 에페소에 가는 것 빼고는..."


    밖에서 들어온 호스트 후세인이 에페소로 가는 길목에 성모 마리아의 집이 있는데, 한 번 가 볼만  거라고 추천한다. 셀축에 오는 여행자들은 천주교인이든 아니든 모두들 한 번씩 거길 들린다고 했다. 나는 삶은 달걀 껍데기를 까다 말고 그의 말에 좋다고 했다. 갈 데가 생긴 것이다. 나는 아침을 먹고 다시 호텔을 나섰다.


    성모 마리아의 집은 깊은 산속에 있었고, 작았다. 나는 그녀의 성품과 그 집이 잘 어울린다 생각하면서도 그 작은 집에서 평생을 살았을 노모를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아릿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녀의 아들은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셨다. 그녀는 십자가에 달린 아들을 바라보며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아들의 죽음에 환호하는 수많은 무리 틈에서 눈물을 삼켜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감히 헤아려 볼 수 없는 것이리라.


    예수는 십자가에 달린 자신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어머니를 그의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다. 요한은 십자가 사건 이후로 마리아를 모시고 에페소에 정착했다. 그때 요한의 나이는 많아야 이십 대 중후반. 예수의 다른 제자들이 세계를 다니며 스승의 명령을 성취해 나갈 때, 요한은 마리아의 옆에서 허드렛일을 했을 것이다. 요한에게도 동료들이 가진 열정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게다가 전승에 따르면 마리아가 장수했다고 하니, 아마도 요한은 그의 온 젊음을 이 작은 집에서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며 보냈을 것이다. 나는 그 어린 나이의 요한을 생각하며 또다시 마음이 아릿해지는 걸 느꼈다.


    요한 안에는 늘 싸움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이 답답한 산골 집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 마음껏 멋지게 살아보고 싶은 욕심, 그 야망과 매일 싸웠으리라. 그러나 요한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꺾어버렸고 그 대신 사랑을 세웠다. 많은 일들을 인생 후반에 이루어냈다. 사복음서 중 하나인 요한복음을 썼고, 노년의 몸으로 끌려간 유배지에서 온갖 육체적 고통을 받으면서도 계시록을 써냈다. 그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사랑의 사도'라는 칭호를 얻는다. 다른 제자들은 하지 못했던 일들이다.


    셀축에 돌아와 터키쉬 피자인 피데를 먹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요한을 생각했다. 그가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그에게 설교해 줄 것을 부탁하면 그는 늘 한 단어, 한 문장을 말하고는 설교단에서 내려왔다고 했다. 이렇게.


    "사랑, 사랑하십시오."


2018, 셀축, 터키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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