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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Jul 24. 2020

몇 개의 진심

    작은 출판사의 월간지 표지 그리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6년 전쯤 중고로 들인 아이패드로 심심할 때마다 그림을 그리고 SNS에 올린 게 그 기적의 시작이었다. 내 그림은 투박하고 단출했다. 색은 쨍했고 선은 삐뚤빼뚤 이었다. 레이어가 뭔지, 클리핑 마스크는 또 뭔지 하나도 모른 채 그냥 그렸다. 그러니 내게 그 제안은 기적이 맞았다. 출판사로부터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땐 어리둥절해서 기뻐할 틈이 없었다. 이거 진짜 맞나 싶었고, 혹시 내 그림과 다른 사람의 그림을 착각한 건 아닌가 했다. 그 제안이 계약으로 이어지고 나서야 뛸 듯이 기뻤다.


    결혼을 하고 본업을 놓은 뒤, 처음으로 돈 버는 일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뭉그러져있던 내 마음에 활력을 불었다. 생각해보면 돈을 벌지 못한다는 사실에 왜 그리 까무러져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생활 부족함이 없었고, 아무도 나에게 돈 벌어 오라 눈치를 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자본주의의 폐해인 건가.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고, 돈으로 환산되지 못하는 것은 가치가 없는 일로 치부해 버리는 게 꼭 맞는 일이 된 세상 안에서 '돈 못 버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은 녹록지 못했다. 아팠다. 그건 물리적이진 않았지만, 실재였다.


    그림 한 장 팔아서 버는 돈이 얼마나 클까마는, 어쨌든 나는 돈을 벌게 되었고 그 사실만으로 안도가 되었으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 신봉자인 걸까. 그 뒤로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투박하고 단출했던 내 그림 선이 복잡해졌고, 쨍하고 촌스러웠던 색깔의 톤도 다운되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림 어떠냐고 여러 번 물었다. 수정하고 수정하는 일. 누가 봐도 괜찮은 그림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것과 섞여도 무난하게 예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나는 나를 비워냈다. 그것은 또 다른 노동. 목이 뻐근해지고 펜을 쥔 손가락이 저릿해 올 때까지 그림을 그리는 일보다 내 특유성을 지워내는 노동많이 아릿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틈에서의 일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나를 맞추는 일은 가슴 아릴만한 일이었다. 어쩌면 그 아릿함은 슬픔이었을 것이다. 가볍게 삼켜버릴 울음이라기보다는 목울대보다 더 깊은 곳, 가슴 혹은 그보다 더 아래의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어쩔 수 없는 슬픔. 어떤 이데올로기 아래에 까무러져버린 존재의 슬픔이라면 너무 과한 것일까. 그림 한 장 가지고 무슨, 하고 코웃음을 치고 말 일.


    그러나 내 안에는 몇 개의 진심이 있다. 세계가 작고 약한 존재에게 결코 등 돌리지 않기를 바라는, 진심. 가치가 가치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진심. 그 어느 존재 특유성이라도 '쓸모없음'으로 낙인 받지 않기를 바라는, 진심. 아무도 돈 앞에 엎어지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시인 허수경의 말처럼 누구라도 '건강보험도 없이 늙'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마음. 그런 일들을 성경 속에만 있는 '기적'으로 여기지 않았으면 하는 몇 마디 기도. 그렇게 몇 개의 진심은 결국 하나의 전심으로 나를 이끈다. 나 하나라도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겠다고 결정하는 마음, 그 무엇이라도 사랑하고야 말겠다는 마음으로. 그 하나의 전심으로.


    수차례 수정한 그림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그림은 내 그림이 아닌 탓이다. 아마도 나는 오늘 그림 파일을 과감하게 삭제하고 다시 그려야 하겠다. 아무튼, 오늘은 그렇게 겠다.


ⓒDavid T,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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