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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Jul 26. 2020

포도 안에 담긴 오늘들

    냉면 먹고 나오는 길, 더운 여름날. 가게 앞 주차장을 다 덮고 있는 포도나무를 올려다본다. 가지마다 연두색 알맹이들이 제법 포도답게 매달려 있었다. 서로 닿지 않게 간격을 벌리고 있는 것만 빼면. 설익은 저것들도 가을이 되면, 어쩌면 여름이 다 지나가기 전에라도 할 수 있는 대로 몸집을 키우고 벌린 간격을 빼곡하게 메울 것이다. 연두색에서 보라색으로, 풋내에서 단내로. 하얀 과분을 포슬거리며 한 송이 가을을 맺어낼 것이다.


    어렸을 땐 포도알을 씹지 못하고 꿀꺽 삼켜 먹었다. 동그랗고 미끌거리는 포도알이 어린애 목구멍을 겨우 넘고, 좁은 식도를 따라 또르르 굴러 내려가는 게 포도 맛이라고 생각했다. 씹지 않는 포도알들이 그대로 작은 뱃속에 쌓여, 배만 불뚝. 단맛은 포도 껍질을 쪽 빨아먹는 데서 찾았다. 나중에는 포도씨에 영양분이 다 들어있다는 엄마의 얘길 듣고 씨앗까지 와그작 깨물어 먹으려고도 해보았으나, 그 맛이 영 포도맛이 아니었다. 씁쓸했다. 까끌거렸다. 그 후로 포도를 잘 먹지 않았다. 좋은 핑계다. 사실 나는 껍질 치우는 일이 귀찮았고, 귀찮음에 모여드는 초파리들이 얄미웠던 것이다.


    몇 년 전, 프라하에 갔을 때 지내던 집 생각이 난다. 노란색 안락의자, 높은 천장과 새하얀 커튼, 전구빛, 고장 난 보일러, 열쇠를 건네주던 뚱뚱한 대학생의 검은 책가방. 그에게 열쇠를 건네받고 처음 그 집으로 들어갔을 때, 나무 식탁 위에와인 한 병이 놓여있었다. '행복한 여행이 되길!' 환영의 메모도 그 옆에 놓여있었다. 종교적인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그 와인은 꼭 한 입 마셔보고 싶었다. 그날 저녁엔가, 여행 마지막 날 저녁엔가. 나는 싼 값에 스테이크용 소고기를 사 와서 굽고 와인을 땄다. 잔에다 조금 따랐다. 어렸을 적 통째로 삼켜 먹던 포도알, 작은 손가락으로 야무지게 쥔 포도 껍질을 쪽 빨았을 때의 단맛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으나, 와인은 건조했다.


    "싸구려인가."


    아니면 금기를 깼다는 마음의 씁쓸함인가. 나는 와인잔을 내려놓고 콜라를 따라 마셨거나 주스를 따라 마셨거나 했다. 그러면서도 옆에 둔 와인잔에 담긴 보라를 응시했고, 노아 생각을 했다. 물에서 구원받은 노아가 다시 마른땅 위에 섰을 때, 그리고 그가 다시 밭 가는 사람이 되었을 때 한 일은 포도나무를 심는 일이었다. 그 나무에서 열린 것으로 포도주를 만들어 마셨다. 그 포도주는 어떤 맛이었을까. 프라하의 와인처럼 건조하고 씁쓸한 맛이었을까. 구원의 안도가 섞인 단맛이었을까. 밭일의 고됨을 위로하는 청량감이 되었을까.


    씨앗은 포도나무가 되었고, 그 나무에서 포도가 열린다. 사람은 곱게 매달린 포도를 톡 따서 밟아 즙을 내고 몇 달을, 몇 년을 묵혀 와인을 만든다. 그 와인은 사람의 기쁨 옆에도 앉고, 슬픔 옆에도 앉는다. 여행자의 식탁 위에도 앉고, 농부의 식탁 위에도 앉는다. 와인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손바닥만 한 포도송이, 포도즙 틀에서 굴러 떨어진 작은 포도알 하나라도 괜찮다. 아, 그 작고 가여운 한 알 안에도 수많은 오늘들이 담겨있는 것이구나!


    더운 여름날, 냉면집 주차장에 열린 설익은 포도를 올려다보며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오늘들을 생각했다. 저게 풋내를 벗고 점점 단내를 내게 되는 것처럼, 연두를 벗고 보라를 옷 입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오늘들도 익어가겠다. 아직 나에게 닿지 않은 먼 미래의 오늘도 어쩌면 저 안에 담겨 있겠다. 작은 포도알이 품은 몇 개의 씨앗과 그 안에 숨은 몇 그루의 나무에 나의 오늘들이 주렁주렁 달리겠다.


    더운내 가득한 날 냉면집 앞에서, 나는 작은 것 너머에 숨은 큰 것을 생각했다.


ⓒYuichi Kageyama,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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