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위해 나 자신과 싸우기 시작했다.
“나 제주도에 가려고.
제주도에서 책 한 권 완성하고 올 거야.”
오후 6시 35분,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그동안의 지난했던 연애들을 떠올렸다. 과거의 상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감정을 소모했던가. 또 얼마나 발악하며 불안과 의심을 떨쳤던가. 이제는 이 한심한 연애의 악순환을 끊어야 했다. 오랫동안 꿈꿨던 제주로의 도피가 그 시작점이 되길 바랐고, 바라던 대로 될 것이라 믿었다.
큰 착각이었다. 제주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서울에 남은 내 남자친구 J가 얌전히(라는 표현을 써서 미안하지만) 잘 있는지를 걱정해야 했다. 한마디로 말해 의심에 종속된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 냈다는 뜻이다. 여행온 건 나면서, 남자친구를 의심하는 한심한 나를 마주하는 일은 퍽 유쾌하지 않았다. 의심하는 일이란 늘 내게 그런 것이었다. 상대방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스스로 별로인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아서 피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해 무력감을 느끼는 일. 내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정신적 반응이었다.
제주공항에 발을 디디자마자, 원인도 모를 불안에 잔뜩 휩싸인 채 J에게 전화를 걸었다. 괜한 불안감이 해소되고 나면 ’나 잘 도착했어.'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비행기 창밖 풍경 사진도 잔뜩 자랑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다 보면 으레 그래왔듯이, 불안의 안개는 걷히리라. 일상을 공유하는 연인들의 평범한 대화가 내게는 이토록 간절한 일이었다.
그러나 J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정확히는 받지 못했다.) 연신 반복되는 통화연결음은 불안의 기폭제가 되었다. 퇴근 시간이 넘었는데도 전화를 받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슨 일이 생겼나, 아무래도 회사에서 무음으로 해두었던 걸 풀지 못한 모양이지, 그래도 내가 제주도에 도착했을 시간을 모르는 건 아닐 텐데, 운동 갈 시간도 아닌데 말이지, 혹시 다른 누군가(여자)와 있는 걸까, 아니겠지, 아닐 거야, 진짜 아닐까?
걱정으로 시작해 상상으로 이어져서 의심으로 확정되는 억울하고 지겨운 이 패턴. 의심에서 벗어나겠다던 비행기에서의 다짐은 도착과 함께 허망하게 깨졌고, 결국 온갖 상상이 휘몰아쳤다. 최악의 상황(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우고 있는 상황)을 미리 상상함으로써 미연의 상처에 대비하는 강한 자기 방어가 시작된 것이다.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상상에는 가속도가 붙었고, 자기 방어기제도 덩달아 휩쓸려왔다. 호흡이 가빠진 상황에서 나를 안정시킬 수 있는 건, 머릿속 상상이 만들어낸 상상을 깨고 안전한 현실을 마주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또 받지 않았다.
또 걸어도, 받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내가 스스로 허용하는 의심 전화는 최대 3 통이다. 그것을 넘기는 순간, 의심녀에서 집착녀로 변모한다는 것을 숱한 연애 경험을 통해 알아내고 말았다. 누군가는 이러한 의심의 패턴에 진저리를 칠지도 모른다. 나 또한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러나 머리로는 알면서도 좀체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이도저도 못하고 야속한 휴대폰만 손에 꾹 쥐고 있을 찰나, J에게서 전화가 왔다. 불안에 잠식된 내 목소리는 이미 잔뜩 일그러진 채였다. J는 휴대폰을 방에 둔 채, 빨래를 널고 있었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예상대로 회사에서 무음으로 해두었던 것을 풀지 못했다고 했다. 가빠왔던 호흡도, 조여왔던 심장도 차츰차츰 제자리를 찾는다. '걱정했구나'라는 그의 한 마디에 긴장했던 몸이 느슨해진다. 그제야 온갖 상상에서 눈앞의 현실로 돌아온다.
숨을 몰아 쉬고 나니, 이내 불안의 안개는 걷히고 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금세 남자친구 J에게 또 미안해졌다.
시작도 버거운 이 여행, 이대로 괜찮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