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밭과 돌담 사이, 그 어디쯤에 의심을 숨겨두고
'의심하지 않고 사랑하는 법'을 찾고 싶었다. 현재에 안주해서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의심 10년 차 경력자인 내게는 확실한 변화가 필요했고, 그 첫 시도를 '제주도 한 달 살이'로 결정했다. 매일 똑같은 일상, 똑같은 의심, 똑같은 다툼의 반복을 등진 채 회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때론 회피가 정답일 때도 있을 테니.
네이버 검색창에 ‘제주도 한 달살이’를 검색하고 서칭을 시작하자, 30만 명의 멤버가 있는 네이버 카페가 나왔다. 타지에서 오랫동안 홀로 시간을 보내기엔 두려움이 엄습했는데 ‘30만’이라는 꽤나 큰 숫자를 보고 있자니 괜히 안심이 되었다. 나처럼 제주도에서의 삶을 계획해 본 이가 30만 명은 있었으리라, 안심한 채 네이버 카페를 구경했다.
카테고리 중에는 게스트하우스 스텝 모집에 관한 공고가 있었다. 당시 나에게 '게스트하우스'란, 20대 초반의 청춘들이 모여 파티를 하는 곳이었기에 스텝을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미 30대에 발을 들였고, 아토피로 인해 술 또한 마시지 않았으며, 책을 쓰는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수많은 공고 게시물 중 한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정원 책방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게 '정원' 그리고 '책방' 두 단어가 어쩐지 반갑게 느껴졌다. 공고 또한 다른 게시물들과 다르게 감성적인 사진과 진정성 있는 사장님의 언어로 표현되어 있었다. 게다가 책방 겸 여성 전용 숙소라니, 일주일에 2번 숙소 관리와 투숙객 응대만 하면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니, 남은 시간은 모두 자유 시간이라니! 이곳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 따윈 찾을 수 없었기에 바로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고 스텝으로 지원했다.
이 일을 결정하기까지는 단 3일도 걸리지 않았다. 나답지 않았던 빠른 실행. 그동안 계획으로만 그쳐버린 일들이 많아서 더 이상의 한심함은 허용하지 않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유난히 나와 결이 맞아 보였던 책방 겸 여성 전용 숙소인 ‘정원책방’에서 그동안의 삶과는 조금 다른 일상을 보내게 되었다. 남자친구 J와 한 달간 볼 수 없다는 것 자체로 내겐 큰 도전이었다. 연락이 조금만 안 돼도 불안해하는 내가 이렇게 J와 떨어져 있는다고? 헛웃음이 났다. 기어코 제주에 온 내가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긍정이었다.
제주도에서의 삶은 나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숙소에 도착한 첫날밤, 기대 어린 마음으로 한참을 귤밭과 돌담 사이에 서서 조금은 나아진 미래를 꿈꿨다. 한 달 뒤면, 다 괜찮아질 거란 생각에 괜스레 웃음이 났다. 그리고 다짐했다. 10년 전, 내 아픈 과거를 글로 쓰자고, 내 상처를 고발하자고, 그렇게 다 털어내면 된다고.
그런 지난하고도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고 나면 섬에서 육지로 향하는 비행기에는 의심에서 자유해진 내가, 한결 가벼워진 채 몸을 싣는 내가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내게 펼쳐진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