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산 위 기울어진 땅

by 권씀

눈발이 날리면 산 위 기울어진 땅은 가장 먼저 얼었다.


기울어진 땅에 터를 잡고 사는 이는 비가 오는 날보다 눈이 오는 날을 더 싫어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길이 미끄럽기는 매한가지였지만 눈이 온 날에는 집으로 올라가는 것보다, 집에서 내려오는 게 여간 마음을 먹지 않고서는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그의 사정을 모르는 산 아래 사는 이들은 눈이 내린다면 기왕 내릴 거 함박눈으로다가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며 봄부터 가을까지 주야장천 주문을 외듯 소원을 빌곤 했다. 그런 소원이 모이고 모여 이뤄진 해가 되면, 산 위 기울어진 땅에 사는 이는 퍽 난감해져서 앓는 소리를 냈다. '에라이, 오라질 것!' 하고선 침을 탁 뱉어내기 바빴다. 엉덩방아를 찧는 것도 익숙해질 법했지만 뭔갈 들고 다시 올라가기엔 영 마땅찮았고, 내려오는 건 큰 모험과도 같았다. 무엇보다 다른 이들은 눈 내리는 걸 보고 행복해한다는 게 더욱 자신의 비참함이 부각되는 것 같아 눈 오는 날이 영 마땅찮았다.




성탄절이 끝나고서 매서운 바람이 불어댔지만 눈이 오지 않았던 해가 있었다. 볕이 그리 따뜻하지도 않았고 회색빛의 낯을 한 하늘만 한참이던 때, 산 아래 사는 이들은 눈이 언제 올까 내기를 하기 시작했다. 산 위 기울어진 땅에 사는 이는 그걸 보면서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내 저럴 줄 알았지. 눈은 무슨 놈의 눈. 안 보이니까 이렇게 좋은 걸! 내기 아무리 해봐라. 눈이 오는가.' 혼잣말을 되뇌면서 매일밤 기도를 했다. '내일도 눈 오지 않게 해 주시오.'라고.


그러던 어느 날 개운하게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보니 이게 웬 걸. 어제까지만 해도 말끔했던 길이 하얗게 변해있는 게 아닌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옷을 대충 걸치고 나가보니 산 아래 사는 이들이 대형 제설기에 끊임없이 물을 부어서 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는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선 허둥지둥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놈들 날 골탕 먹이려는 게 틀림없어!' 씩씩거리며 내려가던 중 발을 헛디뎌서 그는 그만 나동그라져 그대로 산 아래까지 데굴데굴 굴러갔다.


'아이고, 어르신. 많이 안 다치셨어요? 괜찮으세요?' 데굴데굴 굴러가던 그를 가까스로 붙잡은 마을 사람이 건넨 말에 그는 벌컥 화를 냈다. '네 눈엔 내가 괜찮아보이냐! 이 놈들 어디 갔어. 왜 눈을 만드냐 말이야.' 그는 팔을 걷어붙이고 제설기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눈이 안 오면 그렇구나 하는 거지. 부러 눈을 만들어? 나 죽으라는 거냐?' 얼굴이 빨개지도록 화를 내는 그였지만, 산 아래 사는 이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많았기에 너무나도 간단하게 제압이 되었다.


'겨울엔 눈이 와야 제격 아닙니까.' '올해는 눈 구경을 한 번도 못했는데 이렇게라도 하니 얼마나 좋아요.' '아무렴, 비보다는 눈이 낭만적이지.' '눈구경을 이렇게라도 하니 참 좋네요.' '산 위에서 눈 내린 풍경 보면 얼마나 좋을까!' 무수한 말들이 두서없이 그의 머리맡 위로 이리저리 오갔고 이에 그는 역정을 내려다 말았다. 눈이 오는 것을 그 말고는 모든 이가 바라고 있었기에 말을 붙여봤자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에라이, 평생 눈이나 맞으면서 살아라. 퉷!' 구부정한 허리에 손을 얹고서 그는 그렇게 산 위 기울어진 땅으로 올라갔다. 한참이나 올라가 가까스로 집에 도착한 그는 혀를 끌끌 차며 산 아래 사람들이 제설기를 계속 가동하는 것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마냥 밤이 길던 계절이 멀어지고 따스한 봄바람이 불면서 마을 가득 하얗게 쌓였던 눈은 녹기 시작했다. 얼음에 가까울 정도로 얼어붙었던 눈은 그새 세상 먼지를 다 머금은 모양인지 시커멓게 구정물로 되어 마을 구석구석 질척였고 사람들은 볼멘소리를 냈다. '눈이 오면 눈 오는 대로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그러려니 하면 되는 거지. 누가 제설기 쓰자고 했어.', '그러게나 말이에요. 아유 이 구정물 좀 봐. 집 밖을 못 나가겠어.', '다들 눈 보면서 좋아하지 않았어요? 좋아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사람들은 다투기 시작했다. 제설기를 가져온 사람, 눈을 더 만들자며 물을 더 부은 사람 너나 할 것 없이 말을 퍼부어댔고 급기야 멱살잡이까지 하고야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경찰을 부르니 마니 하며 한참이나 다투던 그들은 문득 산 위 기울어진 땅을 바라봤다. 산 위 기울어진 땅에 사는 이가 산 아래쪽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고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낡은 난로를 본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