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에스키모인들이 화가 나면 풀릴 때까지 걷는다는 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난 화가 많은 편인데 그게 다 풀리려면 지구 세바퀴는 돌아야하지 않을까 하고 자조섞인 농담을 건넸었다. 살다보면 화가 날 때가 생긴다. 이를테면 하는 일이 잘 안 되거나, 사람 관계에 있어서 오해가 쌓여 그대로 화로 발전하는 경우, 내 기준점에 비춰봤을 때 불합리한 일이 생겼을 경우 등. 악인은 도처에 깔려 있고 나와 가치관이 맞지 않거나 비합리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은 더욱 많다. 나에게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내가 다른이에게 그런 사람이 되기도 한다. 절대적인 부분도 있지만 상대적인 부분이 더 많이 존재하는 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리 나아진 건 없지만 나이가 더 어렸을 때는 대책없이 화를 내곤 했었다. 화를 표출하는 방식이 물건을 내동댕이치거나 욕을 내뱉는 경우도 있었지만 뒷일을 생각않고 버럭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버럭하는 행위를 한 뒤 따라오는 어색한 분위기, 소원해진 관계 등을 겪고나서부터는 화를 낸 후의 상황을 염두하게 되었다. 아예 보지않을 관계라 하더라도 화를 내어서 얻는 것이 없다면 굳이 화를 낼 필욘 없겠다 싶었다. 용서를 하는 개념과는 달리 그냥 이런 저런 사람이 있구나 정도. 간혹 너무 아닌 경우에는 골똘히 그 사람의 행위와 나의 기준점에 대해 생각을 하기도 했고, 내가 도의적으로 책임을 질 부분이 있는 경우에는 나서서 사과를 하거나 상황을 수습하기도 했다. 물론 그게 언제나 가능한 건 아니어서 여전히 화가 날 때는 어찌할 바를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그런 날이 오면 나도 하염없이 걸으려 하는 편이다. 내 몸이 고되면 생각을 덜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고 땀을 흘리면서 생각을 덜어내자는 의도도 있고. 몸이 너무 좋지 않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되도록 하루에 일정 시간 걷기를 하려하는 편인데, 확실히 걷기를 하고 나서는 생각이 좀 덜어졌다. 몸이 고된 것도 있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생각을 덜어내기도 하고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돌리기도 하고. 하루 목표치를 정해놓고 걷지만 생각이 유독 많거나 화가 잘 풀리지 않는 날엔 걸음 속도를 달리 해서 운동량을 늘리곤 한다. 비록 난 에스키모인은 아니지만 한없이 걷고 싶은 날엔 마냥 걷는다. 뉘우침과 이해 그리고 용서의 길을.